[칼럼] 모든 사물의 처음은 공예였다

칼럼 / 편집부 / 2019-01-07 16: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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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만들어진 신조어 공예(工藝)는, 정의도 내려지기 이전에 다른 장르에 의해 몸체가 찢겨져, 통섭의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21세기 소외의 장르다. 아름다움은 아트(순수미술)로, 도구제작 기술은 산업에, 프로세스를 주관하는 의장(意匠)은 산업디자인으로 산산이 분화된 공예는, 공작소(工作所)로 전락해 타의에 의해 존재성을 규정 당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강물은 도도한 흐름 그 자체가 존재감이듯 공예 또한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와 미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제품 혹은 작품, 기능, 효율, 장인, 예술가라는 언어에 갇혀 존재의 근본을 탐문 받고 있다. 관점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해석되는 지금의 공예는 전통기술에 기대거나 예술에 편승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상윤 디자이너 작. 화(華(오일램프, (W)140×(D)140×(H)320, 황동도금). 공예의 실용화를 위한 디자이인 작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작품 중의 하나더.

 

공예에 대한 불편한 인식


공예 혹은 공예품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알고 싶어 먼저, 2~30대 여성에게 “공예에서 가장 먼저 연상 이미지는?”이란 질문을 던졌다. ‘도자기, 장인의 주름진 이마, 닳고 거친 손, 도구, 이미지 없음’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수학 여행길에서 만난 불국사 입구의 조악한 기념품이 공예에 대한 첫 기억이자 공예(품)의 실체였다.


대중의 인식은 물론, 수제목가구를 만드는 젊은 목수 대부분도 자신의 명함에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새기면서 애써 목공예가임을 회피한다. 공예의 본질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공예’는 전통이라는 갑옷을 입은 낡은 유물로 취급 받는다. 


사전적 의미의 공예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능성 물건을 만드는 일’로 정의 된다. 그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예는 생활에 쓰이는 물건이기 전에 ‘일’이라는 행위가 그 중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공예가 ‘기능적 도구를 만드는 기술에 장식을 더하는 것’이라는 경직된 도그마에 안주할 수 없는 이유다. 다시 말하면 공예는 일상의 모든 행위의 조력자이면서 통로다. 


앞서 말한 전문직 여성들의 공예에 대한 인식도는 초등학교 교과서의 공예사진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한다. 일반 대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차가운 사회적 인식에 대한 냉철한 제고 없이는 공예는 자기 체면에 갇혀서 국비에 연명하는 기형적 장르로 추락할 수 있다.

 

김명진 디자이너 작, 꽃문 문갑((W)900×(D)360×(H)1400 l 월넛, 알루미늄_아노다이징)


공예의 재인식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이 도구이든, 기능이든, 장식이든 만드는 것은 모두 공예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시작과 함께 대량생산 체계 안에서 심미적 욕망을 장식하려는 산업디자인이 등장했고 소유의 평등주의와 함께 모든 상황을 주도했다. 이를 계기로 인간이 손으로 만드는 행위는 순수조형예술 그리고 다소 하위적 개념의 공예로 이분화 됐다. 


기계문명의 소산으로 등장한 영화라는 장르는 대중예술이었던 연극을 골목안의 어두운 예술로 내보냈고 또 영상 미디어의 총아인 텔레비전은 영화에 예술적 역할을 부여했다. 예로부터 통합적 능력으로 문명 발달의 기저였던 공예가 그 가치를 상실한 이유는, 산업화라는 혁명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고유적 기능이 분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의 영역을 재생하기보다는 공(工)을 외면하고 예(藝)에 기생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공예가, 연극과 영화가 대중성에서 예술성을 취득한 길로 동참할 수 없는 이유는 '쓰임'이라는 일상성에 있다.


현대공예가 전통, 장인, 공예디자이너, 공예가, 공예예술가 같은 중의적 언어로 대중에게 어필해 보지만 대중은 관심이 없다. 순수미술의 완고함과 바우하우스에서 출발한 산업디자인의 공고한 대중시장의 지배력에 수작업이라는 행태적 무기는 대항마가 될 수 없다. 무릎의 충격 완화를 위해 수만 번의 테스트를 거쳐 출시한 ‘나이키 에어’ 디자이너에 모호한 기능에 장식으로 마감한 비효율성의 공예가는 맞수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나름의 장식과 나름의 수작업임을 애써 주장해도 겨우 몇 사람의 기호에서 그치는 소규모 영세 숙련가에 그칠 뿐이다.


정재훈 소목장 작, 소파 테이블((W)380×(D)380×(H)600, 찻상-(W)600×(D)340×(H)280 l 참죽나무, 오동나무)


공예 인식의 재설정


10미터의 목재를 제재기로 재단해 우드슬랩을 만들면 공산품이고, 수제 톱이나 대패로 자르면 수제품이 되는 것이 아니듯, 수공예는 이제 그 의미를 재설정해야 한다. 공예는 기능과 효용의 산물이 아니라, 비정량화와 결핍성을 채워가는 과정의 산물로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한 때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진 비범한 손의 능력에 덤덤하고 지속적인 감성의 어우러짐을 말한다.


목수는 나무의 목리가 움직이는 선을 따라가다 ‘이쯤이다 싶을 때’ 멈추면 그만이다. 작업자만이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숙련된 상황이 결과를 만든다. 그것은 미의 감각일 수도 오랜 경험의 결과일 수도 있다. 똑같은 것의 재생산이 아닌 불연속의 희소성이 이야기를 만들고 공감을 낳는다. 


공예가 모든 장르를 다 가질 수 없고 그럴 필요는 더욱 없다. 세상이 변했다. 조형예술의 독자성, 효능에 감성을 입힌 완전함으로 향하는 산업디자인, 첨단의 로봇에게 과감하게 그 기능을 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기업의 기능성 음식과 고급 레스토랑의 화려한 식단을 마다하고 ‘집밥’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멈추지 않는 사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유정민 디자이너 작 'arch series' 재료의 혁신을 통해 대중화의 가능성을 연 작품이다.


공예가의 태도가 공예다 


얼마 전 종방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각 장면에는 잘 만들어진 공예품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만들고 쓰는 과정에서 느리면서도 섬세한 일련의 동작까지 모두 아름다운 공예였다. 느리게 잘 살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은 막상 값싼 공산품들로 살아간다. 깊은 호흡을 머문 채 움직이는 동작에서 공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서서히 더듬어가는 느린 감성은 그것을 보듬는 사물이 있을 때 완성된다. 사물은 그런 존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이 모두 공예다.


전통목수가 재현하는 조선의 가구는 서민들의 애용품이 아니다. 왕족 혹은 사대부의 물건이면서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이 주문한 가구다. 목수의 숙련된 기술과 선비의 지적 통찰력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는 확실한 소비층이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활짝 열린 세상에 해외명품까지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공예는 선비가 부재한 시대에 선비공예를 지향한다. 또 복제된 전통이 현대를 앞서려 하고, 사소한 공예는 공산품에 양도해버렸다. 소비가 없는 시대에 전방위적 소비를 갈망하는 것이 오늘의 공예다. 

 

산업 디자인 제품이 소비자의 의도를 헤아렸거나 유혹한 것이라면, 공예품은 공예가의 주관성이 깊이 스며든 사물이다. 공예는 결과물 이전에 그것의 시작과 과정이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으로, 연역이 아니라 귀납의 과정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또 공예는 예술이 되어가는 것이지 예술로 시작할 수 없다. 일상의 도구를 만드는 그것도 잘 만드는 행위가 공예다. 디자이너들이 심미성과 기능성을 근거로 제품을 구상하듯 공예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제품이 아닌 사물을 지속적으로 다듬어가는 행위가 따라야 공예다. 이것은 대량생산되는 저가 공산품에 피로감을 느끼고 삶의 질을 가다듬으려는 현대인들에게 공예가 잘 사는 법을 제시할 수 있는 호기가 된다. 

 

오래 전 필자는 경주 석굴암을 취재한 적이 있다.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마주한 석굴암본존불(국보 제24호) 앞에서 그 존엄함에 사지를 떤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저 돌을 빚었을 뿐인데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 어느 무명의 석공은 도대체 누구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석공이 예술가, 디자이너, 공예가 등의 호칭과 소비성에 연연했을까? 무명의 석공이 지녔을 무던한 반복적 행위가 위기의 공예를 살리는 단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예는 제작자 중심이 아니라 사용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쓰임’이 소멸된 공예는 표류하는 돛단배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잘 만든 공예품이 모두 잘 쓰이지는 않는다. 친구가 접어 준 천 마리의 학을 유리병에 담아두고 내내 버리지 못한 기억이 있다. 쓰임은 물질의 기능성 소비와 함께 감성의 소비도 있다. 우리는 사물에 의해 살아간다. 지금의 공예가 몸을 낮추고 삶의 질을 가꾸는 데 일조한다면 시장은 의외로 쉽게 열릴 수도 있다. 

 

브랜드 ‘오트오트’의 옻칠그릇. 전통기법을 현대적 소품에 녹인 작품이다.



유유히 흐르는 공예 

 

된장과 김치는 대표적인 전통식품이면서 현대인의 필수품이다. 특히 된장은 집집마다의 숙주종균이 각각의 맛을 결정하기 때문에 무균시설의 공장에서는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대기업이 도전했다가 번번이 실패한 대표적 음식이다. 된장이 숙성을 통해 제품이 되듯이 공예도 만든 이의 기술에 사용자의 어루만짐이 더해지는 숙성 과정이 따를 때 완성된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무대중앙에 서서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방 가수의 처지가, 지금의 공예라 말한다면 도가 지나친 걸까? 위기의 공예는, 된장의 손맛도, 플라스틱도, 아이폰 디자이너도 공예가로 끌어안는 넓은 포용성을 가져야 한다. 귀족적이고 소극적의 공예는 머지않아 소멸할 수 있다.

 

박수이 공예가의 옻칠그릇. 


다시 공예시대


공예가 다시 부활하려면, 제작자의 고유성과 사용자의 쓰임이 하나가 되는 공유공예(共有工藝)가 대안이다. 진정한 공예는 만드는 이의 직관과 사용자 감성이 지속적으로 교차하는 시간성으로 완성된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위대한 공예품은 2~300년이라는 사용자의 시간이 중첩된 것들이다.
인간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 사물로 살아간다. 그것이 예술, 디자인, 산업, 기술, 기능, 효용, 효능, 공산품 등 그 어떤 이름으로 규정되든 모든 것의 처음은 공예였음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머무는 것은 유물이다. 전통은 유유히 흘러 오늘의 강이 되어야 한다. 공예적 삶도 그것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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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견]

:)님 2019-01-09 18:55:37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글이네요.
나이키와 비효율적인 공예가를 비교하는 부분은 저를 돌아보게도 만들었습니다.

공예의 개념과 가치가 낡은 유물이라는 고정관념과 완벽하지않은 공예품들로 흐려질 수는 있지만, 산업디자인, 예술, 공산품 등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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