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식 조선가구 목수...“나무를 알아야 목수지”

장상길 기자

woodeditor1@woodplanet.co.kr | 2025-05-16 01:13:03

▲ 개인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이남식 목수 

 

막 마흔을 바라볼 무렵이었다. 생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한 남자가 있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안정된 직장과, 평온한 가정을 꾸리고 살던 한 가장은 그렇게 지난 생을 통해 형성된 실존 그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고민했다. 그의 고민은 타자에 비치는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마저도 새롭게 재구성하고 싶다는 아주 강한 존재론적 욕망이었을 테다. 해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 앞에서 흔들리던 ‘나’는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또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그가 해답을 찾는 순간, 당연한 일이었지만 삶의 척력(斥力)이 작용했다. 그렇게 한 생을 밀어낸 자리에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바투 다가서는 다른 생이 있었다. 木手의 생이었다. 그게 운명이라면 나무를 손으로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을 팔자였을 테다. 그렇게 목수의 길에 들어서 올곧게 우리 나무로 조선가구를 짜는 목수 이만식을 만났다.

이 목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간 곳은 경기도 김포의 한 제재소였다. 그는 제자들과 나무를 켜고 있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그는 이내 송재차에 실린 나무에 시선을 고정했다. 목리를 예측해 분필로 켜질 방향을 표시한 거대한 느티나무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둥근톱을 향해 서서히 전진하고 있었다. 한 판 한 판 켜질 때마다 이윽고 세상에 속살을 내보이는 무늬는 저마다 달랐다. 그가 나이테를 가늠해 나무가 켜질 방향을 잡을 때 예측했던 바로 그 무늬였는지 아닌지가 궁금해 그의 기색을 살폈지만 그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표나게 변한 것은 먹감나무에서 태극 문양이 나왔을 때였다. 한 나무가 다 켜지면 다른 나무가 송재차에 올라 톱을 향했다. 그 나무들 중에는 속이 썩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나무도 있었고, 언제 박혔는지도 모를 대못이 두 개나 속에 박혀 있어 톱날이 상하는 일도 있었다. 참죽 하나에는 어른 주먹 둘을 합친 크기의 돌이 박혀 있어 그걸 빼내느라 한참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사이 나는 짧은 질문을 하나둘씩 툭툭 던졌고, 그도 툭툭 대답했다.

오전 8시에 시작된 작업은 점심때를 훌쩍 넘겨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상차를 끝내자마자 그는 서둘러 양평으로 길을 물었다. 나도 그가 운전하는 트럭 뒤꽁무니를 쫓아 양평으로 길을 물었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가예공방, 그가 개 키우고, 농사짓고, 가구 짜며 사는 거처로 가는 길이었다.  

 

▲ 제자들과 수업 중인 이만식 

 

이 목수와 얘기다운 얘기를 나눈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 김포에서 양평으로 온 나무를 일부 정리하고, 전통가구 입문반 수업까지 마친 후였다. 시간은 밤 10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참나무 열기로 뜨끈해진 난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나는 대뜸 살아온 이력을 얘기해 달라고 말했다. 고백컨대, 목수 이만식에 대한 공부가 없어 나온 얄팍한 질문이었지만, 대물림한 목수가 아니니 목수라는 신고간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연이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는 지난 이력을 말해 무엇하냐며 손사레를 쳤다. 이번에는 아예 그 어떤 절망과 권태가 목수라는 들길로 당신을 내몰았냐고 에둘러 말을 돌려가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때 그가 들려주었던 얘기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마흔줄을 앞둔 한 남자의 실존적 질문이었다. 지금껏 살아왔던 삶에 대한 반성이나, 혹은 자기혐오에서 대안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니니 그가 해답을 찾고자 했던 ‘어떤 삶’은 실존에 대한 순정한 의문인 셈이었다. 이 목수는 뒤이어 그런 질문 끝에 본격적으로 목수의 길로 들어선 뒤로 이전의 삶을 비워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양평에 와서 제일 처음 한 게 양복을 태우는 일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이전까지 읽던 책을 태웠죠. 핸드폰에서 이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 동료들 전화번호도 싹 지웠어요.”

이 목수는 즐겨하던 바다낚시나 골프 같은 취미도 목수의 길을 걸으면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단한 결기였다. 이 목수는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박명배 선생의 문하에서 조선가구 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그야말로 “후회할 시간”도 없이 나무만 바라보며 살았다. 조선가구의 깊이 모를 매력 속으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갔다. 스승을 닮고 싶어 박명배 선생이 가진 공구는 뭐든 똑같이 갖고 있어야 직성이 풀렸고, 스승이 직접 만들어 쓰는 도구들은 사진을 찍어 본인 역시 직접 만들어 쓰며 원리를 터득했다. 똑같은 도구를 썼는데도 스승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이유를 거듭 따져 해결책을 찾았고, 번거로운 일도 마다치 않고 스승 발치를 쫓으며 배움을 이어갔다. 

 

▲ 이만식 작, 이층책장

 

박제가가 남긴 <백화보서>에는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라는 글귀가 실려 있다. 이 목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문득 언젠가 읽었던 그 글귀가 떠올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박문열 선생 밑에서 장석을 배우던 얘기까지 더해지니 나무와 철을 넘나들며 ‘벽’스럽게 자기완결성을 궁구했던 그의 지난 이력과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이 목수는 대패며, 톱, 끌은 물론 가구에 쓰이는 장석까지 손수 만든다. 목수가 목작업 도구를 직접 만들어 쓰는 예는 많지만 쇠 작업까지 두루 꿰고 직접 만드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이 목수는 “목수가 철수가 되는” 여름철에 장석 작업에 몰두한다.

허나 조선가구를 짜는 목수의 길은 끝을 알 수 없었다. 2005년 양평에 가예공방 문을 열었지만 자신이 만드는 가구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목수는 자신이 만든 가구가 나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때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나를 세상에 당당히 내보여도 손색이 없을 솜씨는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목수로서의 삶에 분기점이 찾아온 건 2010년 35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다. 장석, 서예, 서각 분야의 장인들과 협업으로 주역의 뜻을 반닫이책장 곳곳에 녹여낸 이 목수는 그해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다. 무려 2년이 걸린 작품이었다. 스승인 박명배 선생이 1992년 먼저 이 상을 받은 이래 그의 문하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두루 경사였다. 이 목수는 그때서야 세상에 자기를 드러낼 자신이 생겼다. 비로소 나를 팔아도 된다는 면목을 스스로에게 확인받은 것이다.

대개 목수들이 그러하겠지만 이만식 목수 역시 나무에 대한 욕심이 많다. 거의 탐닉 수준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나무 욕심과는 다른 결에 서 있다. 이 목수가 탐닉하는 나무는 우리 땅에서 자란 나무에 한정된다. 조선가구를 우리 땅에서 자란 나무로 만들어야한다는 고집이야 익히 짐작이 되지만 그가 우리 땅에서 자란 나무를 고집하는 속내에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직접 고르고 켜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가며 자연건조를 시킨 후 가구의 쓰임새에 맞게 배치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나무는 각각 특성이 있다. 목재로서의 나무도 마찬가지다. 바람이나 습도, 온도 등에 반응하는 양태가 모두 다르니 나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가구를 만들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의문은 있다. 집 주위를 켜켜이 두르고 있는 저 수많은 나무를 도대체 언제 다 쓰려고 모으냐는 의문이다. 그 질문을 했더니 이 목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 이만식 작,반닫이책장

 

“나도 모르지. 저 나무를 내가 다 쓰게 될지 어떨지는. 그런데 좋은 나무를 고르고 골라 잘 건조해서 가구재로서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놓으면 언젠가, 누군가는 쓰지 않겠어요? 그게 제자이건, 혹은 자식이 이 길을 같이 걷겠다고 하건 때가 되면 그들 손에서 쓰이면 그걸로 족해요.”

살아서건 죽어서건 나무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 오늘 제재소에서 자른 나무만 해도 속에서 못이 나오고 돌이 박혀 애를 먹었다. 그게 나무의 역사고 이야기다. 목수가 그런 나무의 이력을 알고 쓸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 목수가 우리 나무만을 고집하는 데는 그런 맥락도 있다. 누군가가 이 목수에게 나무를 물려받는다면 그 역사까지 고스란히 물려받는 셈이다. 이 목수는 양평에 와서 지인을 따라다니며 2년 동안 나무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 새벽이슬을 맞으며 집에 돌아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때 나무 공부를 하면서 나무에 새로운 눈을 떴다. 제자들을 나무 켜는 현장에 불러 직접 보고 경험하게 하는 것도 나무를 아는 것이 목수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목수에게 나무는 곧 자연이다. 노자식으로 말하면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이 목수는 가구 짜는 일을 자연을 그대로 빌려서 가구라는 형태가 필요로 하는 적재적소에 옮겨 배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옮겨 놓으면 그 뒤는 나무 스스로 알아서 한다. 나무가 가진 목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조선가구다. 자연은 조선의 선비들이 도달하고자했던 최고의 경지였다. 매화니, 소나무 같은 자연에 선비정신을 비유했던 것도 자연은 선비가 닮고자 했던 지향점이었기 때문이다.  

 

▲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만식 목수의 반닫이장

 

뒷마당에 소박하게 화원을 가꾸고 대신 담장을 낮춰 바깥의 자연 그 자체를 집 내부로 끌어들여 정원으로 삼는 차경(借景)의 원리 역시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선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그대로면 족했던 우리 선조의 정신세계가 가구에도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썼던 가구는 극도의 절제미가 특징인 일본이나 과장하고 웅장하게 꾸미는 중국의 그것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에게 조선가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었다. “조선의 가구들이 갖는 디자인적 특성은 선비가 만들었다고 봐야 해요. 선비가 디자인을 제안하면 그 디자인을 가구로 구현할 수 있도록 나무의 성질이나 특유의 문양을 각 요소에 배치하는 게 목수의 일이었죠.” 목수와 선비의 협업체계로 완성된 것이 조선가구라는 얘기다. 그렇게 탄생한 가구에는 한 집안의 철학이나 염원이 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이 목수의 설명이다. 또 조선시대 유교철학이 정립한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는 선비정신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가구라는 일상용품에 철학을 담을 기반이 사라진 것이다. 이 목수는 그 단절이 바로 조선가구가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그 정신을 찾는 것이 이제는 목수의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날 후배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경복궁의 처마를 한번 보라고 얘기하더군요. 흔히 처마 선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데 그런 선이 어디서 왔겠어요? 한옥 처마 특유의 곡선이나 조선가구에 담긴 간결한 직선의 미학적 원리는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궁구했던 선비들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결과인 거죠. 얼마나 멋져요. 그런데 지금은 선비가 사라진 시대에요. 목수가 그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얘기죠. 성리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요. 선비의 정신을 배워 과연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감은 잡을 수 있겠죠.”

외형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이 단절된다면 반쪽짜리 전승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목수의 선택은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 이만식은 좋은 목재를 직접 고르고 제재를 한다. 

 

“조선가구라고 조선이라는 사회에 머물러서는 안돼요. 생활방식 자체가 평좌식에서 입식으로 변했어요. 평좌식 생활에 최적화된 조선가구가 필연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이유에요. 단 기법과 정신은 반드시 전승해야 해요. 그 바탕에서 어떻게 현대적인 가구로 재창조하느냐가 지금 시점에서 전통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의 숙제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조선가구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방법론으로 이 목수가 택한 또 하나의 길은 스승 박명배 선생에게서 배운 교육의 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결국 전통가구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길은 교육을 통해 그 가치를 아는 이들을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목수에게 전통가구를 배우는 이는 50여명쯤 된다.

이쯤에서 이 목수가 만든 가구들 얘기를 해야겠다. 전시실에는 그가 지난 날 만들었던 궤며, 장이며, 반 등속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가 고르고 골라 쓴 나무들이 가구를 구성하는 요소요소에서 자연을 담은 채 “숙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숙성되는 가구 중에는 4년이나 곁에 두고 지켜보는 가구도 있다. 긴 세월을 견디며 한 가족의 역사를 담고 대물림되는 가구를 만들겠다는 고집일 테다. 이 글을 쓰며 다시금 떠올리니 그가 만든 가구들은 목수 이만식을 빼어 닮았다. 조선가구의 진정한 매력은 만들어진 그 순간이 아니라 제 주인을 만나 같이 호흡하며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머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게 디자인이나 형태 구성의 너머에서 조선가구의 아우라를 형성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00년 200년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힘을 지녀야 한다. 그 힘을, 죽은 나무로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목수의 일이다. 

 

▲ 이만식 목수의 작업실 도구들

 

이만식 목수가 사는 양평 문호리는 양수리에서 청평으로 이어지는 363번 국도를 따라 흐르는 문호강변을 끼고 있다. 풍경이 아름답기로 자자해 찾는 이들이 많다. 이 목수는 이 문호리 가예공방에서 목수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가구를 짜고, 제자를 가르치고, 농사도 지으며 산다. 조선가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대와의 조화를 고민한다. 옛 방식을 그대로 따라 박물관에나 남아 있는 괴틀을 재현해서 사용할 정도로 전통을 고집하면서도 우리시대의 목수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까지 사유의 지평을 넓힌다. 그런 그가 지금 걷고 있는 목수의 길이 마흔을 앞두고 그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일지는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다만 그가 계속 걸어야 할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짐작하기에 그의 분투에 좋은 결실이 뒤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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