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은폐돼 있다... 조각가 '마리오 딜리츠'

우리 곁에 숨쉬는 불안은 언제나 은폐돼 있다. 조각가 마리오 딜리츠는 그 불안을 소년의 모습으로 깎아 우리 앞에 내보인다.

육상수 칼럼니스트

ssyouk@woodplanet.co.kr | 2024-08-27 11:23:05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시인의 고백이 마음을 울리는 것은 우리도 종종 그러한 기분이 사로잡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잡담을 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며 정신없이 일상에 몰두하여 살다가도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기분은 언제든 찾아온다.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우리 삶의 비극성에 기인한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는 결국 죽는다. 밥을 버는 일은 눈물겹고, 고통과 죽음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삶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이 비극성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발설하지 않는 비밀과 같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묻지 않는 아내처럼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리오 딜리츠(Mario Dilitz)는 그 은폐된 불안을 우리 앞에 담담히 가져다 놓는다.

불안은 소년의 모습으로


마리오 딜리츠가 조각한 소년 혹은 소녀들은 알몸이거나 바지 하나만 간신히 갖춰 입은 반나체다. 그 몸은 완벽한 비례를 갖춘 미소년의 몸이라기보다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불편함을 주는 몸이다. 아이들은 손으로 몸을 가리고 있거나 엉거주춤 서있다. 얼굴은 겁에 질려 있거나 그것을 애써 감추고 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곤 해요. 그들은 누구하고도 이야기 하지 않죠. 그저 자기만의 일에 골몰해있을 뿐이에요. 완벽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죠. 그 모습이 꽤나 슬프고 고독해 보였죠.”


마리오 딜리츠는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단자적 개인의 고독을 보곤 했다. 그 일상적인 모습에는 삶의 비극성과 거기 놓인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안이 은폐되어 있었다. 마리오 딜리츠는 그 감춰진 불안과 나약함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모델은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묘사하려던 것은 손에 잡히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한 감정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재료는 나무여야 했다.

 


“나무는 제 작품에 있어 매우 중요한 소재입니다. 스스로 특히나 제가 자주 쓰는 라임우드 적층재는 성장과 죽음, 파괴 그리고 재조합의 과정을 통해 생겨난 산물이에요. 우리 인간의 삶과 무척 닮아있죠.”


실물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실적인 모습으로 조각된 등신상 앞에서 사람들은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면에 도사린 공포와 불안이 곧바로 육박해온다.

희망이 없는 자에게만 희망이


그것은 분명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실물에 가깝게 묘사한 극사실주의 그림이나 조각들이 때로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우리 안에 은폐된 불안과 솔직히 마주할 필요가 있다.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 그리고 그것들 앞에 불안하고 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희망에 속지 않고 삶이라는 사막을 정직하게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희망이 없는 자에게만 희망이 있다.” 

 

마리오 딜리츠(Mario Dilitz) | 1973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2010년 독일 뮌헨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네 차례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다. 정밀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모순이라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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