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구 작가 한정현... 아날로그로 경계를 메꾸다
모던-아날로그가구의 아름다움
경쾌하고 조형적 아트퍼니처
오예슬 기자
woodeditor3@woodplanet.co.kr | 2023-02-02 13:39:10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 잡은 크래프트 온 더 힐(Craft on the hill). 한정현 디자이너의 사무실이자 쇼룸이며 갤러리이기도 하다.
가구로 예술을 하는 분들을 보면 왜 하필이면 가구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저는 원래 건축에 관심이 많아서 건축 공부를 할까 생각했는데, 건축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작업해 결과물을 만들어내죠. 하지만 가구는 디자인에서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볼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잖아요. 건축은 디자인은 했어도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는 거고. 그런 면에서 저는 제가 디자인한 걸 바로 볼 수 있는 가구가 편했어요. 전 과정을 제가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죠.
디자인 스타일은 학생 때부터 다져 오신 건가요?
어떤 특정한 스타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사실 제 가구가 중성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남자가 만들었을까, 여자가 만들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유발되나 봐요. “디자이너가 여성 분이셨어요?”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계세요. 제가 둥글다기보다는 각이 지고 딱 떨어지면서 언밸런스한 디자인을 많이 하다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한정현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벤치 포 투(bench for two)’는 어디서 영감을 얻으셨나요?
두 사람을 위한 벤치를 만드는 수업 과제가 있었어요. 딱히 영감이랄 것도 없이 단 5분 만에 디자인을 끝냈던 작품이에요. 미리 조그마한 모델로 만든 걸 그냥 손으로 주물거리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보시더니 “이거 괜찮은데” 그러시는 거예요. 아직 학생 때니까 별 생각이 만든 작품이에요. 그게 1995년이죠.
그녀는 미국의 명문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서 가구 디자인을 전공했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건축에 대한 막연한 애정이 있었던 그녀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전공으로 가구를 택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창의력을 기를 수 있었다는 게 유학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전공을 선택한 그해 첫 과제물로 내놓은 것이 벤치 포 투다. 후에 이 작품이 영국 디자인 전문지 <월페이퍼>에 소개되면서 그녀는 첫 유명세를 타게 된다. 잡지에서 그녀의 작품을 본 한 남아프리카인이 비싼 배송료를 지불하면서까지 그 벤치를 구입한 일도 있다.
여기저기서 작가님의 작품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이해하려고 하죠. 유머, 따뜻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시간이 담긴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이런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중엔 제가 직접 한 이야기도 있어요. 그러한 모든 주제를 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가구를 만드는 거죠. 이야기가 있고 따뜻한 가구라는 게 곧 질리지 않는 가구를 뜻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항상 새로움을 줄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1800년대에 만들어진 가구들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잖아요. 제 가구도 그렇게 남았으면 좋겠어요.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제는 작품마다 달라지지만 나무를 소재로 한다는 것은 모든 가구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하이테크놀로지에 역행하는 편이에요.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고 또 그걸 좋아해요. 저한테 편하고요. 타자기나 옛날 전화기 같은 걸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재미가 느껴져요.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적당히 하이테크놀로지 기기들을 활용하고 있어요.(웃음)
아날로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나무를 많이 사용하시는데, 나무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인간과 같이 나이를 먹는 게 나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생기죠. 인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변하듯이. 특히 원목 가구는 금이 가기도 하고 색이 변하기도 하죠. 그런 걸 보면 인간과 같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아요. 플라스틱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잖아요. 그와 달리 나무에서는 변화와 흐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저는 주로 오크나 월넛, 애쉬를 써요. 그리고 요즘 많이 쓰는 게 더글라스 퍼. 제 가구가 비주얼이 강하다보니 목재의 색감에 많이 신경 써요.
한정현 작가가 디자인을 하면 그녀의 작업 파트너인 공방 장인이 제작을 담당한다. ‘그 여자 디자인, 그 남자 제작’이다. 사실 ‘숨 쉬는 가구’는 공방 장인께서 자주 하는 말이라고 한다. 70대가 넘은 그는 오랜 시간 나무와 함께 한 만큼 나무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애틋하다.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작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숨을 쉬는 가구에 대한 지향점이 생겼다. 그녀의 최근작인 모던-아날로그도 공방 장인이 작품에 활용해보라며 준 빈티지 싱거(singer) 재봉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하나 둘 먹으면서 가구를 보는 시각이나 가구를 다루는 방법이 달라지나요?
주제가 자꾸 변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라면 재봉틀로 모던-아날로그를 만들 생각을 못했을 것 같아요. 초반에는 컨셉추얼한 가구를 많이 만들었어요. 코르크 의자나 옷걸이 같은 것. 이제는 스케일도 커지고 조형미를 강조하는 아이템을 주로 하고 있어요. 제 삶의 변화에 따라 가구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트렌드를 따라가지는 않아요.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제 삶에서 작품이 나오고 그 삶의 변화에 따라 가구도 변해가는 거죠.
가족을 꾸리셨으니 이제는 가족이라는 주제도 생각하시나요?
예전에는 혼자 살았기 때문에 싱글을 위한 가구를 만들긴 했죠. 그 이후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을 위한 가구는 특별히 생각해본 적 없네요.
결혼 이전까지 그녀는 혼자만 쓸 수 있는 가구를 많이 디자인했다. 홀로됨의 정점을 찍은 의자가 바로 텔레-사피언스(Tele-Sapiens)다. 홀로된 이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로봇 같은 의자다. 반면 그녀가 결혼 후에 디자인한 패치 시리즈(patch series), 우븐 소파(woven sofa), 페더(feather), 버드(bird) 등은 가족이 함께 써도 넉넉할 만큼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그녀의 가족이 실제로 사용하는 가구이기도 하다.
작가이시기도 하지만 대중들이 원하는 가구를 생각하시기도 하나요?
그게 제 고민 중에 하나에요. 작가주의가 강할 때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타협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가로서의 고집이 있지만 융통성을 발휘 해야죠. 저는 결과적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아이템과 리미티드 에디션을 동시에 가져가고 싶어요. 대량생산을 목표로 디자인 한 건 아닌데, 만들고 보니 대량생산에 적합한 가구가 보였던 거죠. 많은 투자를 해서 대량생산을 해보려는 시도는 아직 해보지 않았어요. 괜찮다면 외국 회사가 디자인을 사서 대량생산을 해주길 바라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접촉을 하고 있죠. 그런데 사실 제가 비즈니스적인 마인드가 없어요(웃음). 누가 비즈니스 부분을 담당해줬으면 좋겠어요. 디자이너가 사업 수완까지 갖추는 건 어려운 일 같아요.
아직도 가구가 예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나요?
아직 그런 분들이 더 많아요. 저는 예술 작품으로 옷걸이를 만들었는데 “이 돈을 주고 옷걸이를 사?” 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절반 이상이에요. 기능성이 추가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림 같은 건 소장 가치라는 게 있는데 아직 가구는 그런 경우가 적으니까. 이걸 예술보다는 아이템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아요. 제 가구가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죠.
애초에 ‘가구계에 한 획을 긋겠다’라는 야망은 품지 않았다. 그냥 가구가 좋았고 지금도 가구가 좋다. 단지 바람이 있다면 좋은 회사가 대량생산을 담당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정현 가구를 써서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한정현 가구는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힘을 지녔다. 정제된 위트와 유머가 곳곳에 녹아있어 사용하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한다. 대량생산이 실현된다면 그녀의 가구로 행복해지는 이가 많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한정현 가구 디자이너
디자이너 한정현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서 미술학사를 취득한 후, 2001년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미술학 석사를 마쳤다. 2003년 한국에 돌아와 첫 개인전 ‘더불어 홀로’를 열었고, 2007년 가회동에 갤러리를 겸비한 오피스를 신설했다. 지금까지 다수의 국제가구박람회에 참여하였으며 현재는 홍익대학교 목조형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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