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아의 스웨덴 리포트] 사진작가 Stephanie Wiegner...스웨덴의 독일여자, 스테파니
사진을 통해 어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스테파니는 어떤 공간이나 대상을 보면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눈에 보인다고 한다.
편집부
woodplanet@naver.com | 2026-02-24 21:10:13
주변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독일 출신의 스테파니라고 하겠다. 언제나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소녀 같이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는, 아무리 불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초조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스톡홀름의 미술대학 콘스트팍(Konstfack)에서 스토리텔링(현 Visual Communication) 석사과정을 마친 그녀의 첫 클라이언트는 다름 아닌 콘스트팍 학생들이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고, 아직도 내 졸업 작품 촬영하던 날을 기억한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던 날 우리는 유리로 만든 작품을 고이 싸들고 촬영장으로 나갔다.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중 느닷없이 바람이 덮쳤고, 작품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길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금이 간 작품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했지만 스테파니는 그런 나를 진정시키며 혼자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아직까지도 잘 쓰고 있다.
스웨덴에서 사는 것
스테파니 비그너는 독일 뮌헨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스톡홀름으로 유학 왔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 들어간 뮌헨 미술대학은 통합된 학부 시스템이었고, 덕분에 사진 수업 과제를 하기 위해 필름 카메라를 처음 접한 그녀는 이거다 싶었다고 한다. 언제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꿨냐는 듯이 빠르고 깊이 사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진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한 고민은 ‘어떻게 독일을 떠날 것인가’였다. 그녀가 살던 독일에서의 인생은 너무 뻔해 보였다. 산과 들이 보이는 느긋한 마을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겠지 싶었다. 그러던 중 콘스트팍의 ‘스토리텔링’이라는 과를 발견했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그동안 겪었던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패션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고, 학생 신분으로만 살아왔던 스테파니에 비해 일과 삶을 조율할 줄 아는 프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잠하던 스테파니 비그너의 욕구가 설렘으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에게서 듣는 스웨덴 이야기와 참 다르다. 우리가 보는 스웨덴은 그야말로 너그럽고 느긋한 나라가 아닌가. 하지만 삶의 속도를 떠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스웨덴인처럼 친절한 사람들을 찾기도 어렵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민족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특유의 친절함을 지키기 위해 말을 돌려서 하는 경향이 있다. 직설적인 화법에 익숙한 독일 사람에게는 편한 소통방식이 아니다.
스테파니에게 스웨덴 문화에서 받은 영향이 무엇이냐 물어보니 ‘평등의식’이라고 했다. 이 점만큼은 한국인이나 독일인이나 동의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학교에서 발표를 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여자와 남자가 있는 사진이었고, 여자가 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남자가 도와주는 이야기였다. 발표 후 돌아온 피드백은 스테파니의 무의식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표현한 성역할이 스웨덴 사람들에겐 편견으로 다가간다. 그때부터 스테파니는 자신의 작업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되었다. 자신이 보여주는 것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본인 역시 이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사진작가 이야기
스테파니 비그너의 사진에선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길고 긴 이야기 중 스틸사진 하나를 포착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밖의 이야기는 “직접 상상해보세요”라고 운을 띄우는 듯한 사진들이 많다. 한 가지 특징은,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감정의 부재를 통해 상상의 제약을 없애는 거예요.”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하는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어른 시절의 세계를 놓지 않고 있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어른이 되면서 무한했던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잖아요.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요.” 스테파니는 상상의 눈을 갖고 있다. 어떤 현장이나 대상을 봤을 때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보인다고 한다. 자기는 그걸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라고, 이 작업들을 통해 모두 일상에서의 특별함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가 추구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독일보다 스웨덴이 월등히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차를 조금만 타고 나가도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고, 오래된 시간을 머금고 있는 공간이 많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손이 많이 타지 않은 구멍가게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겨울이 다가올수록, 어딘가 기분 좋은 우울함이 나지막하게 깔린다. 독일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스웨덴은 도시든 시골이든 모두 영감이 넘치는 곳이라고, 아무래도 사람이 더 적고 규모가 작은 나라라서 그런 것 같다고 추측해 본다.
그녀는 영감을 받기 위해 가끔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드라이브를 떠난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집이 보이면 차를 세우고 현관에 노크를 한다. 자기소개를 하고,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며 당신의 집에서 촬영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본다. 지금까지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뿐이었다고 했다. 길을 걷다 섭외한 모델도 꽤 많다. 이처럼 스웨덴 사람들은 예술에 있어서 개방적이다. 일상에서 예술을 접하는 것에 익숙하고, 예술을 소비하는 행위 또한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의 인지도와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프리랜서 사진작가에게는 굉장한 메리트로 작용한다.
한편, 스웨덴 사람들은 직업에 있어서만큼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짙은 것 같다. 스테파니가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할 때면 사람들이 신기해한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에게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에게서조차 사진이 본업인지, 힘들거나 불안하지는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줄곧 받는다고 했다. 물론 물가가 비싸고 세금이 높은 나라에서 프리랜서로 사는 게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꾸준히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고, 걱정스러움보다는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기대가 될 뿐이라고 했다.
사진가의 가구
콘스트팍 클라이언트 중에는 유독 가구 디자이너가 많았다고 한다. 스테파니 역시 부피가 작은 제품보다 가구 촬영이 더 재미있다고, 그 이유로 가구는 공간 및 사람과 더 넓은 범위에서 상호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가구에도 이야기를 심는다. 그녀가 촬영한 가구는 이미지 속의 공간 또는 사람과 소통하며 상상력을 자아낸다. 의자의 모습을 담기 위해 얼어붙은 호숫가 위에서 티타임을 갖기도 하고, 아늑한 가정집에 스툴을 한 무더기 쌓기도 한다. 촬영을 통해 가구 디자인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고 하는 그녀는 스웨덴 가구를 한마디로 ‘모던하다’고 표현했다.
결혼을 했지만 아직은 이사가 잦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짐을 가볍게 해야 하고 집을 위한 지출을 줄이게 된다. 중고시장이 활발한 유럽에서 그녀 역시 빈티지 가구를 구매해 왔고, 유학생들이 쉽게 사고파는 이케아 가구도 온라인 중고시장을 통해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아쉽게도 스웨덴 사람들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브랜드 이케아를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좋은 물건을 오래도록 쓰는 것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케아 가구의 내구성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두 번째로는 윤리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비치는 대기업의 이면 때문이다. 스테파니 역시 이케아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근래에 와서 디자인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며 특히 PS 시리즈를 꼽았다. 그녀처럼 이동이 많고 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디자인과 가격이라고, 드디어 이케아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사진작가가 보기에도 스웨덴은 가구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작가나 프리랜서, 파트타임이나 풀타임 회사원 등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할 수 있으며 디자인에 대한 눈이 높고, 재료나 마감 등의 퀄리티에 대한 기준도 엄격하다. 무엇보다 소비자 수준이 높다 보니 시장이 크고 기회가 많은 게 사실이다. 소비자로써의 스테파니가 가구를 모으는 방식은 필요할 때마다 빈티지 마켓을 통해 하나씩 사는 것이었다. 스웨덴에서는 브랜드와 가격대 상관없이 좋은 가구를 쓸 수 있다는 점이 좋다며, 디자인과 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에서 자신만의 가구를 발견할 때의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그녀의 집은 그렇게 추억을 하나씩 쌓으며 완성되고 있었다.
이제 스웨덴은 다시 기나긴 겨울을 마주하고 있다. 그 곳에서 계절의 바뀜은 기온보다 빛의 길이로 먼저 느껴진다. 스웨덴에서의 빛은 단순히 밝고 어두움이 아니라, 감정의 또 다른 형태다. 다가오는 계절에 따라 같은 빛도 초조함이거나 설렘일 수 있다.
순식간에 해가 뜨고 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스웨덴의 일몰과 일출은 굉장히 길다. 매일 같이 오색영롱한 하늘이 잔잔한 바닷물 위로 펼쳐진다. 특히 그 시간대의 빛이 납작해서 작업하기에 좋다는 스테파니는 곧 다가올 묘하고 우울한 스웨덴의 겨울을 기대하고 있었다. 정적이어서 더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겨울에 사진을 찍고, 밤이 죽은 나라이기에 밤에만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성과 상상력을 발견하는 그녀의 사진이 뭇 어른들의 잠자는 피터팬을 깨워주길 바란다.
글 사진 룬아 l 작품사진 Stephanie Wie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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