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과 질료 사이, 언캐니한 매력...신예원의 플라스틱 공예
2024 삼각산금암미술관 공예 전시 공모전 선정작
알레산드로 멘디니 같은 포스트모던 감성과, 인상파 회화의 점묘법 구사
삼각산금암미술관에서 11월 7일부터 12월 18일까지 열려
최범
dissae@hanmail.net | 2024-11-12 22:43:55
알록달록한 색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디지털 무늬 같기도 하고 봄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것이 마치 실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스텔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표면에 작은 조각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폴리카프로락톤(policaprolactone; PCL)이라는 플라스틱으로 성형한 것이라고 한다. 레진처럼 반죽을 한 뒤 마치 수제비 빚듯이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내 붙인 거란다.
신예원의 작품은 나무나 PVC 자바라로 형태를 만든 위에 PCL 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다. 플라스틱은 말 그대로 최고의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을 자랑하는 재료인 만큼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오늘날은 플라스틱이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플라스틱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민주적인 재료이다. 플라스틱은 그 종류만도 수 백 가지라고 하는데, 신예원은 그중에서도 PCL이라는 재료에 꽂혀 작업을 하고 있다. 가루로 된 재료를 물에 넣고 끓이면 밀가루 반죽처럼 되는데, 그것을 조금씩 떼어내어 준비된 틀에 붙인다고 한다. 공예는 전통적으로 자연 재료를 많이 사용하지만 오늘날에는 플라스틱 같은 인공 재료도 적지 않게 활용된다. 그래서 플라스틱 공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신예원이 플라스틱으로 작업을 하는 것은 단지 재료공학적인 관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감성인데,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료 실험을 통해서 그녀가 만들어낸 감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한다. 우선 첫눈에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같은 포스트모던 감성이 느껴지기도 하고, 인상파 회화의 점묘법이나 심지어 산수화의 미점준(米點皴)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기법과 표면 효과가 신예원의 작업을 약간 판타스틱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세련되고 매끈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그런 감성인데, 작가는 그것을 컬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신예원의 작업에는 모종의 ‘언캐니(uncanny)함’이 느껴진다. ‘언캐니’란 ‘익숙한 낯설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원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개념이다. 일상에서 익숙하게 보던 사물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고 심지어 기이하게까지 느껴지는 경우가 그렇다. 신예원의 작업에서 그런 것이 느껴진다. 의자, 탁자, 조명등... 분명 익숙한 사물, 낯익은 형태인데, 뭔가 좀 낯선 느낌, 명료하지 않은 형태와 색감, 그런 것. 그녀는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일까. 이러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감각 또는 감성은 어떤 것일까. 나는 신예원 작업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낯익은 대상에서 느껴지는 묘한 낯섦. 익숙한 사물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경험. 신예원의 작업은 익숙함과 낯섦, 그 사이에 있다.
공예는 재료의 예술이다. 결국 재료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공예의 본령인 것이다. 물론 이때 공예의 재료는 다양한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예컨대 흙은 재료일 뿐 특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흙을 보고서 어떤 도자기가 만들어질지를 예견할 수는 없다. 그에 반해 나무는 색깔이나 무늬, 결 등이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형상성을 가진다. 따라서 목공예는 그러한 나무 자체가 가진 형상성을 최대한 살리는 작업을 하게 마련이다. 플라스틱은 나무보다는 흙에 가깝다. 플라스틱 재료 자체에서는 어떠한 형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플라스틱은 아무런 색채도 없다. 색채도 원한다면 입혀야 한다. 신예원의 작업은 어디에 해당될까. 정확하게 말하면 둘 다 아니다. 신예원은 아무런 형태감이 없는 플라스틱을 사용해서 형태를 만들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형태가 거꾸로 모종의 재료성을 강하게 띠는 그런 작업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이 형상(eidos)과 질료(hyle)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예원의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작업은 의자, 탁자, 조명등 같은 형상과 플라스틱이라는 질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신예원이 플라스틱이라는 질료를 사용해서 만든 사물들이 다시 강한 질료적 형상과 언어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예원의 작업은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뒤집거나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다른 질감과 감성을 드러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신예원의 작업은 그렇게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지난다.
‘언캐니 밸리’는 일본의 로봇공학자인 모리 마사히로가 소개한 개념이다. 사람들이 로봇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봇이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똑같이 닮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고 불쾌해한다는 것이다. ‘언캐니 밸리’는 바로 그 호감과 비호감 사이의 경계를 가리킨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약간 그로테스크한 느낌.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인 바로크 감성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약간 일탈적인 느낌, 신예원의 감성은 그렇게 ‘언캐니 밸리’를 지나는 것이 아닐까. 세련되고 반질반질하고 매끈하고 컬러풀한 플라스틱 제품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신예원의 플라스틱 공예는 그러한 감성을 거부한다. 대신에 거칠고 비균질적인 질감을 통해 뭔가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결국 그녀의 작업이 의도하는 것은 기존의 사물과 재료를 다르게 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의자, 탁자, 조명등... 그녀의 사물들이 주는 느낌은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와 현대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다. 이것이 신예원의 작업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 세련되고 현대적인 실내에서 매끈한 오브제를 원하는 이들의 감성에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한번쯤 감성의 ‘언캐니 밸리’를 지나가보고 싶은 사람들, 뭔가 색다른 매니아적인 감성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글: 최 범/ 디자인 평론가
- 자료 제공: 삼각산금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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