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을 통한 용서 그리고 톱밥의 쓸쓸함
오예슬 기자
woodeditor3@woodplanet.co.kr | 2023-03-23 22:45:58
“세상에 목공 영화가 어디 있어!” 하시겠지만, 목공소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목재소도 간간이 등장한다. 영화 명장 다르덴 형제의 영화 <아들>이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청소년들에게 몸 쓰는 일을 시키며 그들의 ‘갱생’을 돕는 직업훈련소. 목공 기계가 시끄럽게 우는 어두운 방에 목공 교사 올리비에가 있다.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톱밥은 기형도가 그의 시 <조치원>에서 읊조렸던 ‘톱밥의 쓸쓸함’ 보다 조금 더 쓸쓸하다. 귓속 톱밥이 어지간히 간지러울 텐데도 간지러움이 무색할 만큼 무기력함에 깊게 중독되었다.
아들은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아내는 아들의 그림자가 드리운 집을 떠났다. 홀로 남은 올리비에를 보고 있자면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생각난다. 촉촉이 이슬을 맞은 나무(tree)가 아닌 축축이 비를 맞은 나무(wood). 양지바른 뜰에 놓고 바싹 말리면 좋겠지만 그는 그런 곳을 갖고 있지 않다. 차라리 더 깊숙이 젖어 썩어 문드러지길 기다리는 것 같다.
외로움이 익숙한 그에게 철공보다는 목공이 조금 더 낫다는 소년, 프란시스가 왔다. 아들을 죽인 바로 그 녀석이었다. 소년의 얼굴을 잊을 리 없었던 올리비에는 그를 자신의 시야에 놓고 지켜본다. 그런데 올리비에의 행동이 수상하다. 프란시스가 개인 공구함을 만드는 과정을 꼼꼼하게 봐 주질 않나, 줄과 사포를 손에 쥐어주며 올바른 자세까지 잡아준다 .
함께 목재소를 방문해 오레곤 소나무와 캐롤라이나 소나무의 차이점을 가르쳐주며, 나이테를 능숙히 읽어내는 프란시스를 기특하게 여기기까지. 이런 올리비에의 행동, 독자 여러분은 이해하시는가?
그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년을 용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과 함께했을 추억을 소년과 되풀이하며, 이제는 아들을 놓아주려 한다. 썩기 직전까지 갔던 자신의 마음을 용서로써 조금씩 회복하려 한다.
여러분들이 올리비에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는가? 목공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용
서의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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