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유화성... 스웨덴에서 찾아가는 자신

스톡홀름에서 바이마스(BYMARS) 디자인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는 유화성은
스웨덴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편집부

woodplanet@naver.com | 2026-01-26 23:01:14

 

2002년, 대학생들의 유럽 배낭여행이라 하면 런던·파리·로마·프라하 등의 도시들을 훑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 해 여름, 유화성은 북유럽을 찾았고 그 곳에 마음을 두고 왔다. 비행기 삯 뿐 아니라 물도 빵도 비싸서 고생했지만, 살고 싶은 곳을 찾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유’가 그들의 일상에서 우러났다. 결국 결혼과 동시에 유학을 떠났고, 졸업과 동시에 아빠가 된 유화성은 스톡홀름의 멋진 아틀리에에서 바이마스(BYMARS) 디자인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다. 남편이자 아티스트, 아빠이자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스웨덴은 도도하고도 너그러운 곳이었다.

콘스트팍이어야만 하는 이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콘스트팍(Konstfack, 150년 전통의 스웨덴 예술대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열게 된 과정을 물어보니 유화성은 이렇게 대답한다. 졸업식이 6월초였는데, 6월말쯤 돼서 아들이 태어났다. 비자 만료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스웨덴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은 사업자 등록뿐이었다. 애초에 스웨덴에서 디자인스튜디오를 열고 싶어서 유학을 결심했던 터라 곧장 실행했다. 고맙게도 현실이 그의 등을 마구 떠민 셈이다. 스웨덴에서는 사업자 등록을 하면 비자 신청이 가능하고, 심사 중에 출국만 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거주가 가능하다. 

 

사업계획서라든지 재정 상태 등을 확인하긴 하지만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스웨덴 이민국은 너그러운 편이다. 게다가 최근에 들어서는 유학생들의 건의를 적극 반영해서 졸업 후 간편하게 6개월짜리 비자를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구직이나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발판을 만들어 준다는 얘기다. 이처럼 남녀노소, 자국민, 외국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게 원칙인 스웨덴에서는 조금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스톡홀름보다는 헬싱키가 우리가 상상하는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더 자아내는지도 모르겠다. 얼어붙은 호수 뒤로 자작나무숲이 펼쳐지는, 묘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풍기는 헬싱키에 비하면 손바닥 만한 스톡홀름도 현대적인 대도시처럼 느껴진다. 유화성 역시 처음에 고려한 학교는 헬싱키의 알토(Aalto)대학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직접 손으로 작업하는 걸 선호하며, 다소 철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알토는 너무 아카데믹한 학교였다. 알토는 이론 연구나 리서치의 비중이 높고,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해 아무리 학생의 작품이라도 앉을 수 없으면 의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에 비해 콘스트팍은 실험성에 더 가치를 두는 편이고, 장인정신을 높이 사며, 공예와 순수예술에 가까운 디자인을 허용한다. 디자인 이론 보다는 작가의 논리가 더 중요한 편이다. 디자이너와 예술가의 경계가 모호한 콘스트팍의 석사과정은 그 성향만큼이나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스스로 갈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시간 낭비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유화성 디자이너를 포함하여 콘스트팍을 경험한 학생들은 “방황으로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곳”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게다가 콘스트팍의 워크숍(기계시설과 공구가 구비된 작업실)은 유럽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직접 만들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티스트들에게는 꿈의 공간인 셈이다. 이 워크숍 때문에 학교에 지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모든 학생들에게는 기본적인 워크숍교육이 제공되며, 일반 워크숍과 전문 워크숍으로 나눠 주 전공과 타 전공을 구분한다. 

 

유화성이 재학 중일 때는 산업, 가구, 금속, 도예, 시각, 회화 등 세부적인 과목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분야 간 벽이 무너지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많은 과목들이 통합되어 현재는 디자인, 공예, 회화,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의 네 가지 커리큘럼으로 개편되었다. 콘스트팍은 사회적 현상을 의식하면서도 쉽게 개혁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교육 구조에 비해 굉장히 발 빠른 조치를 취하는 학교다. 물론 학비가 무료였던 기막힌 시절은 지났지만, 그에 따라 장학금제도가 생겼으니 지금이라도 스웨덴 진출을 꿈꿔볼만 하지 않을까 싶다.

디자인에 묻어나는 스웨덴의 삶 



콘스트팍에서 마음껏 자신을 탐구한 유화성은 졸업 후 꿈에 그리던 스튜디오를 열었다. BYMARS의 대표작이라 하면 ‘Hat’ 조명을 들 수 있다.


“형태 언어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게 제 논문의 숙제였어요. 문학은 글로 만드는 예술이잖아요. 형태 또한 언어이기에, 형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거죠.”

그 과정에서 비슷한 기능 언어를 가진 물체들을 대체시켜 보다가 나온 것이 ‘Hat’ 조명이다. 전등갓도 모자도 빛을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니까. 스톡홀름 디자인페어를 시작으로 시장에 내보였는데,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다. 구매문의도 간간이 오곤 했다. 그렇다고 제품화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마침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차세대디자인리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받은 지원금으로 조명 양산을 시작했다. 그는 굉장히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다. 무엇 하나 허투루 결정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한다. ‘Hat’ 조명이 진짜 제품이 되어 시장에 나오기까지 1년 반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성과로 영주권 심사에 당당히 합격했다.

 


유화성은 ‘Hat’ 조명이 자신의 대표작인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그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보통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보다는 대중성을 띠는 작품이 유명세를 타기 때문이다. ‘Hat’ 조명 역시 그러했다. 졸업논문을 쓰면서 습작으로 만들어 본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웨덴에서 당당하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기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기특한 작품이다.

유화성 디자이너가 한국에서 활동했다면 과연 조명을 디자인 했을까? 스웨덴에서의 삶은 그의 디자인 세계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다. 오랜 겨울 동안 무겁고 길게 어두움이 깔리는 스웨덴에서 조명이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아늑한 인테리어를 위해 빛은 언제나 따뜻한 걸 선호한다. 하얀 전구는 구매도 어렵다. 작업실에서 쓸 만한 LED 전구 좀 사 올 수 있겠느냐고 물을 정도니까. 그가 조명을 디자인하게 된 건 어쩌면 지극히 새로운 무의식에서 나온 욕구일지도 모른다.

형태 언어를 소재 삼은 것도 스웨덴의 영향이 크다. 그는 생각했다. 스웨덴에서 ‘럭셔리’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특히 예술가의 세계에서 명품 같은 사치품은 거의 터부시되는 대상에 속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멋은 표면적인 장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런 제약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들의 디자인은 절제되고, 근본적이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장식을 배제하고 나면 구조, 비율, 컬러 같은 요소들만 남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 사용하는, ‘lagom’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알맞은’ ‘딱 좋은’이라는 뜻인데, 과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그들의 디자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화성 디자이너는 이런 제약에서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실험해 보려 했고, 그 결과 형태와 기능으로 이야기를 쓰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의 최근 작품, ‘Torso’와 ‘Towers’ 캐비닛에서도 변해가는 가치관을 엿 볼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대걸레자루 따위가 예뻐 보이더라는 거다. 공장에서 저급 목재로 대량생산되는 하찮은 대걸레자루가 측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인간의 기준으로 태생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고 역할이 정해지는 나무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고 싶었나 보다. 그는 대걸레자루를 한데 모아 원목으로는 만들 수 없는 가구를 만들었다. 이런 작업 또한 스웨덴에서 사는 탓일지도 모른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는 목소리로 그는 설명했다. 그렇다고 스웨덴 사람처럼 디자인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봐요. 제 색깔대로 해야 이곳에서 저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거죠. 이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한다면 전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 걸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돼요.”

lagom의 행복을 찾는 삶



글을 쓰면서부터 소설가? 칼럼니스트? 에디터? 같은 질문을 숱하게 받아왔다.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글로 표현할 뿐이다. 스웨덴에서는 그 누구도 유화성 본인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제품을 디자인 하냐고 물어보는 이가 없다는 뜻이다. 스웨덴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남에게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면 된다. 

 

직업이 무엇이건, 경제력이 얼마나 되건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그는 스웨덴에서야 비로소 유화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 그냥 끈기가 다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한국이었더라면 끈기 하나로 여기까지 버티는 것은 힘들었을 거라고, 한낱 한량으로 치부되어 혀 차는 소리를 들어와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렇게 보니 마냥 동화 속 나라의 이야기 같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어려움도 당연히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정말 잘하지만 스웨덴어에 능통하지 않다면 그 도도한 사회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참으로 외로운 싸움이 될 거다. 춥고 어두운 지방이라 그런지 현지인들은 각자의 가정과 집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외부인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그 다음이다. 스웨덴의 큰 명절인 미드썸머(Midsommar)를 아직도 어떻게 즐겨야 할지 모르겠다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유화성에게 가족의 의미는 갈수록 커져만 가고,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 키우고 있다.

좋아하는 나라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지만, 내 눈에 그는 아직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더 많은 일들이 그의 앞에 놓여있을 테고, 아티스트로서의 이상과 가장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할 삶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름이었고, 그는 햇빛을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인터뷰를 하자고 나를 이끌었다. 작업실에서 7분가량 떨어진 공원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긴 여름 해는 티 안 나게 천천히 서쪽으로 기울었고, 스톡홀름 사람들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소중한 시간을 만끽하러 모조리 공원에 나와 앉아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앉으려는 나에게 “한국 사람 다 됐네”라고 하는 그의 얼굴에서 알맞게(lagom)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스웨덴 사람의 표정이 스쳤다.

・ 글 사진 룬아 l 사진제공 BYMARS

룬아 l 서울과 스톡홀름에서 제품 및 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더콤마에이'를 통해 인터뷰어와 포토그래퍼를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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