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의 조각가 김종영... 정직한 아름다움을 빚어낸 불각(不刻)의 조각
“예술가에게 있어 진정한 관중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곧 관중을 속이는 것이다”
강진희 기자
woodeditor2@woodplanet.co.kr | 2025-11-30 23:08:59
“예술가가 생각하는 관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많고 넓을수록 좋다. 그러나 진정한 관중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곧 관중을 속이는 셈이 되고,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은 그만큼 관중에게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된다.” 김종영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한 말이다. 그 역시 자신이 말한 대로의 삶과 예술을 살았다.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고결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던 김종영 선생은 한국 근현대조각의 선구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국근현대 추상조각을 대변하는 김종영 선생은 삶 내내 끊임없이 탐구하고, 도전하고, 가르치고, 즐기며 美를 추구했던 예술가였다.
선생은 <새, 1953>, <전설, 1958>, <자각상, 1963>, <가족, 1965> 등 이름 붙인 작품들과 수많은 무제 작품들, 그리고 파고다공원 <삼일독립선언기념탑, 1963>과, 포항 <전몰학도충혼탑, 1958> 두 개의 공공조각을 남겼는데,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은 전두환 정권때 이유 없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충격을 받아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길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분개한 선생의 제자들 및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끊임없이 작품의 복원을 청원하였으며, 이에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은 원래 모습 그대로 서대문공원에 다시 세워질 수 있었다.
“공공조각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 큰 돈이 되는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많은 조각가들이 공공조각을 하길 원했죠. 그렇지만 김종영 선생님은 수많은 제안을 뿌리치고,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두 작업에만 참여하신겁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물질에 욕심을 내어 작품을 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어요.” 김종영미술관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타고난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던 조각가
김종영 선생은 1915년 경남 창원 창원면 소답리 영남 사대부 가문의 성재 김기호와 이정실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시·서·화(詩·書·畵)에 재능을 보였으며 17세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국서예실기대회에서 1등으로 입선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예술적인 재능을 키우기로 유명했던 휘문고에서 장발선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발 선생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조각가의 길로 이끌었으며, 후에 서울대학교로 불러들이는 김종영 선생의 평생스승이 된다.
휘문고를 졸업한 선생은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며 부르델(Emile Antoine Bourdelle),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자드킨(Ossip Zadkin) 같은 서구 조각가들과 그리스 예술을 공부하였다. 이후일제말기의 군국주의적 풍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향 창원에서 은둔하듯 살며 작품활동에 치중하던 그는 해방 후 1948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창설되며, 국내 최초의 조소과 교수로 임용된다. 선생은 서울대에서 미술학장을 역임, 198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해방 후 한국미술의 건설에 힘썼으며 강태성, 최의순, 최종태, 최병상, 엄태정, 심정수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선생은 교수시절인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여인좌상>을 출품한 이래, 동 전람회의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직을 역임하였으며 작품 또한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어 1953년에는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주최한 국제조각공모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에 <나상>이라는 작품을 출품, 국내 최초로 해외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는 작가이자 입상자가 되었다.
단순하고 정직한 ‘불각의 美’
김종영 선생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세 점의 자각상일 것이다. 자각상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업 연도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64년 자각상이 얼굴을 모양 그대로 깍은 일반적인 조각상이었다면, 71년 작은 조금 더 추상적인 작품으로 얼굴형태와 대략적인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으며, 80년 작은 얼굴형도 이목구비도 가장 단순화시킨 작품이다. 특히 71년 작은 나무옹이를 살려 눈으로 사용하고, 나이테와 나뭇결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표정을 표현하여 단순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완벽히 전달되어 선생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만 하다.
“후기로 갈수록 더욱 단순하고, 절제된 미학을 추구하셨습니다. 재료의 본질을 그대로 살리길 원하셨죠. 이는 조각 뿐 아니라 드로잉에서도 드러나는 변화였어요. ‘불각(不刻)’. 깎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조각을 하지만, 최대한 깎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선생님의 작업을 관통하는 철학이었습니다. 불각의 의미만 잘 이해해도 선생님의 작품을 다 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최대한 인위적인 가공을 줄이고 자연에서 모티프를 얻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작품명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 중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전체의 10%도 채 되지 않는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 연도와 일련번호만을 붙였다. 이는 조각가 자신만이 아닌 관중에게도 어떠한 ‘의미에의 강요’ 없이 작품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러한 선생의 정신은 노자와 장자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선생은 학창시절 이후 줄곧 노자와 장자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고, 평생을 겸손한 자세로 작업을 해나갔다.
“절대적인 미를 나는 아직 본 적도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것은 전지전능의 조물주에 속하는 문제이다. 예술가가 미를 창작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김종영)
“이러한 겸손함은 최근의 추상조각가들과도 견주어 볼 수 있어요. 어떤 작가들은 단순한 작품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으려고 하고, 그것을 관중에게 강요한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렇지만 김종영 선생님의 작품은 아무런 지식 없이 바라봐도 그저 편하고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죠.”
그의 작품은 좌우대칭이나 상하대칭이 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비틀려있다. 사실 대칭이란 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결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법이 없다. 다만 전체적인 균형과 비례가 맞을 뿐이다. 그렇기에 선생의 작품은 당장 들어다 자연속에 던져 놓아도 어색하거나 튀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한 작품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연이라는 모티프에 어울리는 정직하고 단순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길 원했고, 관중이 자신의 작품을 편안하게 감상해주길 원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조각 200여 점, 드로잉 3000여 점, 서예 800여 점 등의 방대한 작품을 제작했지만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절제하였기에 단 두 차례의 개인전과 선별된 그룹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발표했다.
자료제공 김종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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