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 모던 가구 스타일의 창시자, 가구의 조각가 핀 율 (Finn Juhl)

디자인 / 유재형 기자 / 2021-12-28 00:32:07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아이템 No. 45
한스 베그너, 아르네 야콥센 등과 함께 덴마크를 대표하는 가구 디자이너
칸디나비아 모던 가구 스타일을 창조한 주인공

 

▲ 덴마크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핀 율.

 

핀율을 두고 북구의 문화 풍토를 국제 사회에 소개시킨 가구 연출가라고 평한다.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를 떠올릴 때 우리는 호수와 백야, 끝없이 펼쳐진 침엽수림을 연상한다. 북유럽의 신비적 경향은 물과 안개와 숲을 통해 수많은 신화적 구조를 만들어 냈다. 덴마크 출신(1912년 1월 30일생)인 핀율은 이러한 태생적 환경을 온전히 체득하고 있다. 

 

가구가 지닌 특성을, 북유럽의 기후 탓에 야외활동 보다는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그들은 가구를 거추장스럽지 않은 신체의 일부로 여겼다. 그래서 간략한 편의와 기능성을 강조한 끝에 스칸디나비안 가구 디자인을 완성했다.

그를 덴마크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집을 둘러싼 모든 논쟁으로 부터 승리한 자라는 찬사를 얻었기 때문이다. 재료와 공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수많은 상과 건축물로 이어졌으며, 1940년대의 암울했던 세계대전이라는 시기적 한계를 뛰어넘은 모던한 디자인으로 지금도 수많은 콜렉터들의 구매 목록 상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 Finn Juhl_Sofa Poet

 


아름다움은 사용설명서가 필요하지 않다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하는 집과 함께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인테리어도 함께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핀율은 그의 아파트에 필요한 가구들을 직접 만들면서 가구 디자인에 눈을 떴다고 알려져 있다. 핀율도 우리들처럼 한때 목공을 처음 접한 초심자였다. 얼마나 큰 자신감을 부르는 전제인가. 우리가 만지는 지금 이 작품이 나라는 브랜드를 일으키는 초속이다. 그래서 나무를 만지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된다. 핀율도 그랬다. 그는 원래 가구를 정식으로 배운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예술사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 건축학부를 나와 건축가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알린 것은 건축이 아니라 가구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핀율의 건축을 떠올리면 그가 거주했던 핀율하우스 외에 딱히 연상되는 건축물이 없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던 1937년 코펜하겐 캐비닛 장인조합 전시회에 출품한 캐비닛 가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상업적 가능성을 실험한 시기였다. 전통적 스타일을 고집해온 가구업계에 그의 도전은 신선한 충격으로 평가됐다.


▲ Finn Juh_Chieftain Chair

 

▲ Finn Juhl_Arm Chair

 

33세(1945년) 때 따로 독립해 인테리어와 가구디자인 전문회사를 차린 핀율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No. 45 체어’도 그해에 발표되었다. 전통적인 프레임 방식을 벗어나 유려한 곡선이 드러나게 형태를 잡은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현대 의자 디자인 역사의 걸작’으로 평가 받으며,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능까지 완벽’하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여기에 작은 의자만 만들다 처음 시도한 큰 의자 ‘치프텐(chieftain)’은 전시장을 찾은 덴마크국왕 프레데릭 9세가 직접 앉았다고 해서 ‘왕의 의자’라는 명예를 가졌다. 특히 1950년 밀란 트리엔날레에서는 5개의 골드메달을 수상해 그의 이름 앞에 명장의 칭호를 붙이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대니시 모던(Danish Modern)’을 소개하며 유럽대륙 보다 더 큰 인기를 미국에서 얻게 된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부와 인기를 동시에 거머쥐는 일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명성을 바탕으로 UN 신탁통치이사회실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으며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가구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것은 전 세계인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보편적 감성이었다.

북유럽 디자인의 전성기는 1940년~1950년대이다. 당대 한국의 시대상은 논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지금에 이르러 신사동 가로수길, 청담동, 홍대 앞 카페를 장식하는 디자인 스타일은 북유럽의 흐름을 모방하고 있다. 몇 십 년을 기다려 우리에게 다가온 스칸디나비아의 혼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감성 디자인이란 그런 것이다. 미적 포만감은 따로 설명서가 필요 없이 본능을 직접 자극한다.

이제 시각 외적인 성공 요인을 따져볼 때이다. 원래 우리 자연 환경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전통가구인 조선의 가구이고 북유럽과 잘 어울리는 방식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다. 하지만 폐쇄적 공동주택에서 난방 보일러와 냉방기를 가동하기에 기후 환경의 영향은 별 상관없는 경우의 수이다. 생활 양식도 북유럽의 것이나 한국의 것이나 구분 지을 이유가 없어졌다. 공통의 학문으로 미학을 공부하고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지도 오래다. 핀란드나 노르웨이 대학에서의 A+ 논문이 한국의 대학에 이르러 B학점으로 내려앉을 가능성은 낮다.

 

▲ Finn Juhl_Easy Chair No-45


또 이러한 문제 제기가 있지 않을까. 서구의 가구가 보편 가치를 얻는 과정은 한국인의 삶의 방식이 서구화되면서 얻어진 ‘공짜’라는 것. 여기에서 서구적 가치가 승리한 것인지는 논외의 문제다. 이 변화는 편의성에 기인했고 주거 환경에 걸맞은 가구를 찾는 현상이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가구를 수납할 주거공간이 소멸되고 없는 마당에 전통가구를 고집하는 일을 계승발전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그래서 북유럽식 전통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결구와 디자인을 완성했다는 핀율의 입담은 조선의 가구에게 새로운 유형으로 한국인들에게 접근할 것을 권하는 듯 보인다. 어찌 되었던 거리의 인테리어는 서구의 것이기 세련되었다는, 이것이 보편적 설득력을 얻는 세상을 걷고 있다. 우리가 현대적인 디자인이라 믿는 이 고풍스러운 40, 50년대 스칸디나비아식 가구를 말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변형 가능한 발전 요소이다. 그래서 문화적 침탈이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창조적 이해의 발판이 되고 있다. 핀 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에릭군나르아스플룬드는 물론이고, 핀 율의 가구를 비난했던 보르게모겐센과 그의 스승이자 현대 덴마크 가구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레 클린트, 7 체어와 에그 체어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아르네야콥센, 북유럽 디자이너로는 드물게 금속 프레임으로 날렵한 디자인을 선보인 폴키에르홀름, 걸작 ‘더 체어(The Chair)’를 비롯해 덴마크 디자이너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한스베그너 등 북유럽 가구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들 모두가 우리 가구디자인을 발전시키는데 쓰일 훌륭한 조력자인 셈이다.


▲ Finn Juhl_Pelican Chair

 

▲ Finn Juhl_Wall Sofa

 


추위와 맞다은 따스한 그곳

러브콜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노키아, 구스타브스베리, 레고 이케아, H&M, 마리메꼬, 로스트란드 브랜드를 앞세워 한국 땅에 찾았다.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의 가슴을 녹였던 스웨덴 출신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처럼 무채색에 가까운 처절한 감성이 한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구도와 절제된 카메라 워킹을 가진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흑백영화가 지금까지 영상 디자인의 교본으로 평가받는 이유처럼 핀율의 가구는 실용적이면서도 굉장히 아름답다.

그들에게 원목은, 가구의 소재가 원목이라고 강조할 이유가 없을 만치 풍부한 산림자원은 디자인의 본류를 북유럽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목조건축의 대가인 솔토건축의 조남호 건축사는 목재 소재의 장점으로 우수한 디자인 구현 가능성을 꼽았다. 산림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시도를 넓이고, 목재 이용에 대한 선험적 경험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북유럽 문학에 등장하는 덴마크 농가 사람들은 테라스에 의자를 놓고 지평선을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숲을 바라보는 것을 즐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산이라고 해봐야 덴마크에서 가장 해발고도는 200m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 Finn Juhl_Chest of Drawers

 

▲ Finn Juhl_Bowl

이들에게 의자는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먼 곳으로 이끄는 교통수단이 되고 상상의 한계점이 꼭짓점에 이르는 추진체이다. 핀욜에게 있어 의자가 가지는 역할은 항공기 퍼스트클래스의 좌석처럼 편안한 여행은 돕는 도구다. 그래서 전통적인 제작방식에 머물지 않고 개량에 힘썼으며, 인간의 심리를 다스리는 디자인을 담고자 노력했던 핀율의 가구는 대를 이어 물려 쓰는 명품으로 남았으나 결코 사치스러운 물건이 아니었다.

 

그 희소성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 비싼 몸이 되었으나 본래의 정신은 오래 쓰고 다시 고쳐 쓰는 빈티지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핀율과 아르네 야콥센, 한스 웨그너 등 북유럽 디자이너들은 가고 없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을 기념하며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고쳐가며 여전히 가구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핀율이 사망한 후 그의 가구는 맥이 끊겼다. 핀 율과 함께 덴마크 가구의 거장으로 꼽히는 아르네 야콥슨과 프리네 한센 등이 대량 생산 체제를 도입했던 것과는 반대로 핀율은 하나의 공방만을 고집한 장인의 길을 걸었다.

핀율의 사후 그의 가구는 덴마크의 가구회사 ‘원컬렉션’에 의해 재생산 되고 있다. 원콜렉션은 최고의 목재가공 기술력을 지닌 일본의 ‘기타니사’와 협력해 목재 프레임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들여온 월넛을 가공해 일본 장인의 손을 거친 프레임은 다시 덴마크로 보내져 완벽한 마스터피스로 부활했다.


▲ Finn juhls house

▶ 핀율은 1937년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 건축학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가구 디자인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핀 율은 스스로 공부하여 가구 디자인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조형의 의자를 선보였다. 그가 처음 디자인한 가구는 자신의 아파트를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핀 율은 자신의 가구들로 집안 내부를 채웠다. 핀 율은 항상 그의 방에 있던 가구들을 표현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그의 집은 아이디어의 원천이었다. 또한 그는 수공예품과 자유로운 예술은 집안의 완성도를 높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테리어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 주택 건설에 관한 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핀 율은 건축가가 인테리어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이런 생각을 모아 실용성의 중요성을 학술지와 주간지에도 게재, 출판했다.
1950년대는 핀 율에게 있어서는 가장 바쁜 시기였다. 1951년 핀 율은 미국무대로 진출해, 당시 UN본부에서는 안정보장이사회, 신탁통치위원회, 경제협력위원회의 인테리어를 해냈고 38살의 나이로 핀 율이 덴마크 대표로 선출되었다. 회의실 공개와 더불어 핀 율의 이름은 순식간에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1956년에는 SAS에서 그에게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터미널 인테리어를 책임져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는 시카고에서 열린 굿 디자인 전시에 참여해 전시와 연관하여 의자, 테이블, 스토리지 유닛, 사이드 보드와 책상 등을 포함한 24개의 가구들을 디자인했고 이때 처음으로 현대 대량 생산과 결합을 시도했다. 1950년대의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핀 율은 5개의 금메달을 수상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 제네러 일렉트렉사를 위해 냉장고도 디자인했고, 네덜란드의 베이커컴퍼니에게 유리제품, 세라믹, 가구들을 디자인해 주기도 했으며, 뉴욕 UN본부 신탁통치위원회의 인테리어 디자인도 했다.

 

자료제공 대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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