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조화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느긋한 풍경을 간직한 강원도 원주의 한 마을. 뚝딱뚝딱 망치질 소리와 쓱싹쓱싹 톱질 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오는 작업실 속에서 김완규 목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과 달리 고운 외모. 82년생 젊은 목수가 만든 가구는 전통적인 한국 목가구의 수려함을 잘 담았다.
떡잎부터 달랐던 10대 시절
하루에 버스가 3대밖에 다니지 않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자란 김완규 씨. 그에게 어렸을 적 장난감은 조경 농장을 하신 아버지의 밭과 창고에 쌓여있는 농기구가 전부였다. 블록을 해체하고 로봇을 조립하는 대신 농기구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만드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지통을 매고 다니는 동네 형이 멋있어 보여, 그 형을 따라 전주공고 건축과에 입학했다. 그것이 김완규에게 훗날 운명 같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조용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조회 시간에 어느 선배가 전국기능경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 시상식을 하더라고요. 그때 ‘나도 저걸 해야겠다.’ 하고 딱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바로 담당하시는 건축과 선생님을 찾아갔죠. 그런데 선생님께서 훈련하면 방학도 주말도 없는데 그래도 할 거냐 물으시는 거예요. 저는 뭔가에 홀린 듯 꼭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날 바로 부모님께 가서 허락을 받았죠.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저것 기초부터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재밌었어요. 훈련 중에는 건축과 건물에서 열흘 동안 안 나간 적도 있고 두세 시간 자고 나서 눈 뜨면 무조건 작업만 했죠. 아파도 거기서 아프고 그러니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완규는 98년 9월 고등학교 2학년 때, 제33회 전국기능경기 대회 가구 직종에 전북 대표로 출전해 금상을 받은 뒤 도내 유일의 국가대표로 제35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해 우수상을 수상했다.
나의 스승, 나의 멘토
김완규 목수는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 조석진 장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석진 장인은 조선 목가구 가운데 전북지역의 명맥을 이어왔던 안은성, 조갑곤으로 이어지는 전통공예의 원형을 간직한 인물로서 1975년 우리나라 최초로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88년에는 목재 분야 명장 1호로 선정되었으며 1998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명인 중의 명인이다.
“고등학교 때 제가 기능경기 대회를 준비하면서 조석진 선생님이 기술 지도를 해주셨어요. 엄청난 영광이었죠.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때 합숙훈련을 시키는데 그때도 자주 오셔서 많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국제 대회에 다녀온 후로는 선생님 댁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가구를 배웠는데 조석진 선생님은 정말 목수예요. 보통 다른 분들은 이렇게 해라 정해서 알려주시는데 조석진 선생님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봐서 네가 편한 방법으로 하라 하고 원리를 알려 주세요.”
조석진 장인에게 배운 것은 비단 가구를 만드는 기술 뿐만이 아니다. 좋은 목재가 있다고 하면 김완규 씨를 데리고 가 나무를 보는 방법을 가르쳤다. 특히 제재목보다 저렴한 원목을 살 때 단면의 생김새나 껍질 상태 등을 보면서 더욱 좋은 나무를 가려내는 법을 배웠다. 책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나무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원목이든 제재목이든 버리는 비율이 적으면서 사용하는 방법과 디자인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라고 하셨죠. 바구니 하나를 만들어도 짜맞춤을 하거나 만들기 위해 소재를 선별하는 법, 나무를 버리지 말고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정말 중요한 가르침을 받은 셈이죠.”
좋은 손, 좋은 디자인으로 가구를 만들다
중앙대학교 공예학과를 졸업한 후, 김완규는 조석진 장인에게 함께 가르침을 받았던 권영덕 목수 공방에서 신세를 졌다. 모아둔 돈이 없어 고민했지만 따로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고향집 창고를 공방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이래저래 작업실 공사를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찰나 대학교 때 인연이 닿았던 조원희 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강원도 원주에 작업실 하나가 비어져 있는데 와서 보고 판단하라는 연락이었다. 막내아들을 도와주시겠다고 묵묵히 지원해주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곧장 강원도 원주로 올라갔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업장은 원주옻칠문화센터 1층에 있는 목공실이었다.
작업실이 생기다 보니 이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김완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을 했다. 난 여태 무엇을 추구하면 작업을 해왔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생각한 이름이 ‘굳핸굳디’였다.
“2011년도 2월 14일에 ‘굳핸굳디’라는 이름을 달고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어요. 갤러리에서 전시도 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가구를 만들어주고 좋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참여도 하고. 돈이 되는 건 다 해왔어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가면서 계속 이렇게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와서 잘 만들 줄은 아는데 제대로 내 것이 있었나?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완규 씨는 우선 내 주위에서 쉽게 얻을 수 있거나 자라온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추억이 있는지 생각했다. 그때 마침 고향집 근처에 있는 승마장이 생각났다. 무턱대고 고향으로 내려가 승마장에 들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말안장이었다. 곧바로 작업실로 가져와서 고민하다가 만든 게 ‘말안장 스툴’이다.
작가도 아닌, 디자이너도 아닌 목수
김완규는 장인들과 만나서 장인처럼 일도 하고, 디자이너처럼 디자인 작업만 하기도 했다. 또 갤러리나 박람회에서 전시하며 작가처럼 작업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목수라고 부른다. 장인과 디자이너 중간에 있는 목수.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딱 한 가지 일만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아우르며 일을 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어떠한 작업을 해도 후회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자신이 후회할 만한 가구는 만들지 말자고.
“어떤 장인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가구를 만들고 납품을 하는 데 가격을 책정하잖아요. 재료비와 인건비,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까지 해서 그 가구에 가격이 나와요. 그런데 작가의 작품은 나무판 위에 돌을 얹어서 천만 원 넘게 불러요. 그럼 그 작품에 재료비와 인건비가 얼마지? 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중요한 건 작가는 꾸준히 작품의 대한 논문을 썼고 연구하고 사회가 인정하면서 작품이 돼간 거잖아요. 그 차이를 이해 못 하고 어떤 결과론적인 부분만 가지고 평가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작가는 꾸준히 자신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주장하기 위해서 살아온 삶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걸 무시하고 결과만 보고 얘기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장인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재료로 더 좋은 질을 가진 가구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예를 들어 목감나무 같이 구하기 어려운 소재를 들여와서 무늬가 있는 부분만 쓰고 남은 부분은 서슴없이 버린다. 그저 가구의 퀄리티를 위해서다. 이러한 장인의 제품 또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김완규 목수는 생각한다.
“별거 아닌 디자인이어도 거기에 솔직히 감정이 들어가면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팔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아껴 놓았던 좋은 소재를 쓴단 말이죠. 안 보이는 부분까지도 마감하고 하나를 만들어도 최선을 다 해야겠다, 이런 감정이 들어가면 그것도 하나의 작품인 거죠. 그래서 만드는 사람보다 디자인을 한 사람이 더 나은 걸로 비치면 싫어요. 그런 부분을 서로 간에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한 고민을 사회가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기술자와 디자이너로 나누는 거 같아요.”
내공이 느껴지는 나를 닮은 가구
‘한국 전통가구가 경쟁력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김완규 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전통과 전승은 좀 다른 개념이지만, 전통을 재해석한다 든지 약간에 변형을 시켜서 간단하게 풀어낼 수 있는 쪽으로 간다면 대중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전통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면 사이비 공법이다,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고 선을 그어버리세요. 여기서 좀 더 열린 생각을 한다면 전통은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것이기에 더욱 훌륭하다고 얘기해야 한다는 김완규. 우리의 공예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재료로 물건을 만든다. 특히 가구 같은 경우, 재료가 나무이다 보니 수축과 평창의 논리와 4계절이 분명한 날씨를 고려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목재에 대한 물성에 집중했다. 나무의 물성을 이용해서 그 특징을 유용하게 활용했던 것이다.
“시대별로 양식이 있잖아요. 스칸다니아 반도의 풍, 미국의 1950년대 스튜디오 퍼니처, 그전의 미술공예 운동, 데스틸 등 말예요. 유행한다고 해서 어떤 풍을 따라가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걸로 잠깐은 돈을 벌 수 있겠죠. 근데 그게 지나가면 묻혀버릴 거예요. 물론 자신의 스타일일 수 있어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중요한 건 정체성이에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죠.”
“사실 ‘이게 나만의 스타일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미 수많은 자료와 수많은 디자인이 나왔기 때문이죠. 이제는 새로운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오면서 작품과 닮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과 단기적으로 모든 것에 승부를 보는 게 아니라 꾸준히 작업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30대에선 힘들어요. 40은 넘어가야겠죠. 그런 내공이 있어야 작품과 나에게 스토리가 있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어야 성숙할 수 있다고 봐요.”
최고의 가구가 되기는 어렵다. 숫자로 순위를 매길 수 없는 무형의 것을 최고로 매기기에는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김완규 목수가 추구하는 작업의 방향 또한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대중이 제 가구를 보고 ‘전통을 가지고 다양하게 해석 하고 있구나.’ ‘김완규라는 사람은 어떤 마감이나 소재에 대한 물성을 무시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사람이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좋겠어요. 그런 말을 들 수 있게 지금도 천천히 내공을 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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