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인 감성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이고 팬시한 작업
삼각산금암미술관에서 11월 7일부터 12월 18일까지 열려
소요유(逍遙遊). 하신혁의 도자를 보자 이 말이 떠올랐다. 소요(逍遙)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유(遊)는 노는 것. 그러니까 소요유는 한마디로 특별한 목적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노는 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소요유는 장자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삶, 즉 자유의 상태를 가리킨다. 하신혁의 도자를 보면 소요유가 생각한다. 그 속에서 노닐고 싶어진다.
물결처럼 구불구불한 형태 위에 무늬가 구비 친다. 거칠고 오돌토돌한 질감의 기형과 주둥이, 몸통에는 무채색 또는 유채색의 무늬가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다. 하신혁의 작업은 도자 산수화이다. 아니 산수 도자인가. 평면이 아니라 입체 산수화. 누구든 하신혁의 도자를 본다면 동양의 전통적인 산수화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산수화는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화면 속에 들어가 거닐듯이 보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산수화의 감상법이다. 산수화는 도교적인 세계관에 바탕 하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의 현실은 유교가 지배했지만 예술은 도교의 영향이 컸다. 유교는 예(禮)를 중시하지만 도교는 노는 것(遊)을 최고로 친다. 물론 공자도 ‘유어예(遊於藝)’라는 말을 하기는 했다. 예술에서 노닌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소요유가 더 상위이다. 아무튼.
산수화에는 세 가지의 보는 법이 있다. 3원법(三遠法)이라고 한다.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는 고원(高遠),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심원(深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수평으로 바라보는 평원(平遠). 이렇게 세 가지가 3원법이다. 이 이론은 산수화의 대가인 북송(北宋)의 곽희(郭熙)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수화에는 한 작품에 3원법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풍경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한 그림 안에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것을 놀이처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화의 1점 투시법과는 다르다.
하신혁의 도자 산수화에서도 3원법을 발견할 수 있는가. 물론 평면적인 화폭에 표현된 3원법이 입체적인 도자기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신혁의 도자에서 그러한 3원법이 도자의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융합되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산수화에서 그리하듯이 도자를 소요유해야 하는 것이다. 하신혁의 작업은 코일링 기법으로 흙을 말아 쌓아올린 후, 손으로 만져서 완성한다. 채색도 성형한 뒤가 아니라 색토(色土)를 만들어서 하기 때문에 명암과 색상이 모두 흙을 쌓아올리면서 빚어진다.
선염(渲染)이라고 부르는 산수화의 바림 기법도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동양화의 선염은 물의 농도를 조절하면서 물감이 번지도록 하는 기법인데, 하신혁의 도자에서는 손으로 흙을 만짐으로써 그런 번짐이 표현된다. 도예 선염법이라 할만하다. 물론 그릇의 안과 밖은 보는 이의 시선과 위치에 따라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산수화에서의 화가와 관객의 시선이 여기서는 입체적인 공간감으로 드러난다. 화면 3원법이 아닌 입체 3원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 가지의 시각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는 셈이다.
하신혁 작업의 매력은 동양적인 감성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겁지 않고 팬시하다는 데 있다. 팬시한 감성은 보기에 따라서 가벼울 수도 있고 그저 예쁜 문화상품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또 이제까지 이야기해온 동양적인 감성이 적당히 균형을 잡아준다. 팬시한 감성은 대체로 현대 도자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런 스타일의 대표 작가로 박석우를 들 수 있다. 그렇잖아도 물어보니 대학원에서 박석우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물론 하신혁과 박석우는 다르다. 박석우가 북유럽적인 노르딕 감성이라면 하신혁은 동양적인 선유(仙遊)의 느낌이다. 박석우가 청아하고 투명한 느낌이라면 하신혁은 한지처럼 거칠고 오돌토돌한 질감이 느껴진다. 박석우의 도자는 유리를 지향한다. 유리처럼 투명한 감성을 추구한다. 북유럽의 맑고 투명한 감성을 보여주면서 그는 최고의 인기 도예가의 반열에 올랐다. 박석우의 제자인 하신혁은 박석우와 전혀 상반되는 감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하신혁의 도자 산수는 만지는 산수다. 구불구불한 기형이 더욱 그런 욕망을 부추긴다. 가히 산수를 만지고 흙 속을 노닌다고 해도 될 듯싶다. 굳이 박석우와 비교해본 것은 바로 그러한 하신혁 작업의 성격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팬시하면서도 동양적이고 또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사실 하신혁은 이미 스타 도예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인기 작가라는 말이다. 30대에 이미 자신의 스타일은 창조했다. 앞으로 그의 작업이 어떻게 변화, 발전할지가 궁금하다. 그를 스타 도예가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전통적인 산수화를 도자기라는 형태에, 그리고 동양적인 감성을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해낸 그의 창의성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한국의 산수화 전통에 단원과 겸재만이 아니라 하신혁의 도자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장르 파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르 확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전통 산수화와 하신혁의 도자 산수화가 나란히 전시된 풍경을 보고 싶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조선 백자 제기(祭器)와 이우환의 작품이 함께 한 전시(<조선 백자 제기의 미와 현대미술의 만남>, 현대갤러리, 2003)처럼 말이다.
글: 최 범 디자인 평론가
(자료제공: 삼각산금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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