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희선, 촐라체를 너머 갈망의 세계로

아트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1-03-10 13:33:19

소설가 박범신은 히말라야 해발 6440m의 봉우리 ‘촐라체’를 사투로 반복 등정하는 이유를 ‘갈망’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갈망을 이루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하루의 앞과 뒤를 알아채기도 전에 오늘에 묻혀 산다. 

 

갈망이란 끝내 이뤄야하는 욕망과 같다. 하루 세끼의 식사와 한 번의 배설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처럼. 작가는 누구나 될 수 도 있지만 그 전제는, 행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그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발 6500m의 봉우리를 수도 없이 넘을 수 있다.

 

 

갈망이란 끝내 이뤄야하는 욕망과 같다. 하루 세끼의 식사와 한 번의 배설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처럼. 작가는 누구나 될 수 도 있지만 그 전제는, 행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그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발 6500m의 봉우리를 수도 없이 넘을 수 있다.

작가 한희선도 나무 작업도 산악인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연유에서 촐라체라는 대담한 작품명을 지을 수 있었다. 마흔이 넘어 다시 길을 찾아 나선 건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거 같았고, 늦게 시작한 만큼 그 열정은 뜨거웠다. 작가라는 장대한 벽 앞에서 좌절과 도전의 반복 속에 점차 강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했고, 가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갈망의 정체를 깎고 다듬었다.

 

 

 

그의 가구는 용도가 없다. 그냥 소유자가 자신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재조합하면 그만이다. 단순한 사면체와 발자국을 기억하는 두 개의 의자는 작가의 경험체로 존재하다가 다른 이를 만나면 다시 태어날 뿐이다. 하지만 최초의 창조자가 이루려했던 갈망의 연유는 이해해야 한다.

안위의 길을 버리고 새 길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나무에 몸 부빈 기억만큼은 가구들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촐라체를 넘어 그녀가 새로 개척한 길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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