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과 보이드의 중력 관계
미학에도 순서와 등위가 있다. 은그릇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상태를 제3위 동일성(同一性) 미학, 휜 눈이 산을 덮고 봉우리는 짙은 회색으로 남은 상태를 제2위 차별성(差別性) 미학이라고 한다. 제1위의 미학은 ‘무경계(無經界) 미학’이다. 이는 불립문자, 이심전심의 공진 상태로 어떤 차별성과 동일성도 수용해 경계를 이루지 못하는 하는 상태를 말한다.
무경계는 모든 사물의 존재 원리인 이치(理致)와 그것의 질료·형질을 나타내는 기운(氣運)을 사상으로 규명한 이기론(理氣論)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사물의 생성 현상에 대한 원인·이유를 나타내는 이(理)와 ‘모이며, 흩어지며, 굽히며, 펴는’ 낢과 뜀의 현상인 기(氣)는 형태를 이루기 직전까지의 자연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경계 그 자체가 무색한 완전한 합치의 세계를 이룬다.
오늘날의 예술은 작가의 세계관에 녹아든 에고(ego)의 저장 장치이다. 에고는 작가의 선험(先驗)이 이끄는 직관과 후험(後驗)이 제시하는 시대감각으로 응시의 대상을 지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비록 그것이 보이지 않는 먼지와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일지라도 투시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의 에고는 한낱 여름날 해변의 모래이거나, 배고픈 하이에나의 기민한 일회성 사냥 기법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에고가 동일과 차별의 좌표를 만드는 일에 분주하다면, 우리가 정녕 원하는 무경계의 이치는 비평가의 언어적 용도에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갈등과 회유, 주의와 주장을 외치는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고,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소리를 건네는 어느 예술가의 무경계 이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작가명도, 작품 설명 한 줄 없는 조선의 달항아리가 최고의 예술품이 된 단초에서 찾아본다. 달항아리의 진심은 구부러진 외형이 아니라, 겉모습을 이루게 하는 텅 빈 속 공간이다. 보이드(void에) 담긴 물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보이드는 우주의 끝에 닿아 빛과 어둠의 질량과 대면한다. 모든 사물은 비움 즉 보이드로 존재할 때, 예술가는 마음과 정신을 일구어 세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고, 예술의 존재 이유에 안착할 수 있다.
유리작가 박성훈의 작품 ‘씨앗 seed'은 120여개의 면을 넘나드는 몸체를 이루지만 그 속은 둥근 원으로 텅 비어 있다. 숙명적으로 작가의 호흡을 통해 원형을 구사하는 유리 블로잉(blowing) 작업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부풀려진 원의 외형에 생명을 불어 넣어 다중의 육각의 면을 조각했다. 박성훈은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점을 되짚어 보는 순간, 의식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호흡이라는 무의식 행위로 유리라는 물질에 생명을 부여하고, 유리가 감추고 있던 내재적 모습을 예술성으로 일구어 놓는다. 그가 물질의 생명 현상을 살피는 까닭은 자신의 성숙과 경이로움을 위한 과정이면서, 자연의 이치와 물질의 성(聖)과 속(俗)을 깨달아가는 제례의식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숨이 끊어질 듯한 단전호흡을 통해 유리의 외형와 내부 보이드를 성형하는 시간 내내, 자신의 번뇌를 갈아내어 도(道에) 이르는 좁은 통로를 순례하고 있을 것이다.
박성훈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험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어떤 자기 설정도 하지 않고 오로지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대학 시설이 그랬고, 대학원 또한 그러했다. 그러한 가운데서 누구나 겪는 청춘의 방황과 불안, 스스로에 대한 미확증 트라우마 또한 그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도망치려 온갖 애를 써보았지만, 유리의 뜨거운 가마는 마치 중력의 중심부처럼 박성훈의 몸과 영혼을 집요하게 잡아당겼다. 어떤 재물도, 명예도 없는 메마르고 혹독한 중력으로부터 그는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박성훈의 에고는 유리 조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유리가 빚어내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
그가 지난한 삶에 굴복하지 않은 자신의 에고의 위치 값이 어디였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의 ‘씨앗’은 벌집과 물의 분자 구조로부터 출발했다. 표면을 가르는 사각면의 조각들은 생명의 입자이면서 물질의 최소 단위이다. 촘촘히 연결된 벌집의 육각기둥은 최소의 재료로 최대의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천재 건축가의 도형이다. 물은 분자 구조 중 육각수는 생명수이다. 하지만 ‘씨앗’의 육각면은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작은 불규칙이 엇각의 면을 이어가면서 전체를 감싼다. 원이라는 무한성과 작가의 무의식이 접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간섭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블로잉이 이룬 원형의 에고와 작가의 저돌적 에고가 절삭과 연마를 거치면서 충돌한 결과이다. 그가 구사하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표면 제작 기법은 그만의 독보적인 세계로 작품의 완성을 위한 절대적 요소이다.
소 한 마리를 해체하는 데 작은 칼 하나로 마무리 하고, 19년 동안 단 한 번도 칼을 바꾸지 않았다는 신기(神技)는 중국 고사 포정해우(庖丁解牛)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손에서 시작해 마음과 정신까지 일직선을 이루는 최고의 솜씨를 일컫는 것으로, 신기는 이념을 관통하고 의식조차 무력화시키는 행위와 상태의 미학이다. 박성훈의 신기는 구(球) 형태의 면을 손의 감각으로 깎아가며 저마다 독립된 세계를 부여한다. 그는 질서정연한 법칙과 무작위적 가능성의 상호작용과 그것을 조작하는 힘의 반복이 이루는 기하학적 질서, 즉 규칙성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했다. 유리 내면의 공간에는 응축된 생명의 에너지를, 손으로 감각할 수 있는 표면에는 장차 펼쳐나갈 작가만의 독립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박성훈은 “나는 유리 본연의 모습에 나만의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는 호흡으로부터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지듯, 단순한 원리로부터 거대한 자연이 구성되고 유리의 근원에 집중하여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보고 싶다.”고 고백한다. 행성이 태양계를 중심으로 질량의 중력 값을 평균해 공유하듯, 자연의 물질 중의 하나인 유리와 박성훈이 중력의 궤도를 이루고 스스로 자전하고, 공전하는 질량의 질서를 세운다. 유리는 그를 통해 빛의 질량을 이루고, 그는 유리를 통해 무의식을 충전한다. 이는 물질의 근원과의 관계 재정립으로 예술의 단서를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 물질과 무경계를 이룬다는 것은 한 예술가에게 삶의 완전한 소진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그것은 결국 텅 빈 공간으로 숨어드는 일이다. 박성훈의 유리 표면은 백팔번뇌로도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부여된 치유의 장소이자 공간으로 들어가는 무의식의 작은 문이다. 유리 표면에 반사되는 세상의 단면들은 자신의 거울에 비친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낯섦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원을 붙잡으려는 작가의 성실함은 그마저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묘한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무의식의 사유는 오로지 몸의 에너지를 탈진한 자에게 부여된 특권이다. 박성훈의 초월적 공간으로 침투하려면, 오로지 작가의 근육에 녹아들어 모든 힘을 상실하는 경험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물질과 색의 파동으로 다가오는 박성훈의 ‘씨앗 seed’은 통증과 슬픔의 시간을 건너 자기 세계로 진입한 유리작가 박성훈의 젊은 날의 초상이다. 소이연(所以然, 마땅히 그렇게 되는 까닭)과 소당연(所當然,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의 이기론(理氣論)적 세계를 저돌적으로 관통한 박성훈 작가가 깊이 응시해야 할 곳은 유리밖에 없다. 유리 씨앗의 표면에 비친 세상의 이치가 내부의 보이드에 안착해 빛의 번뇌를 수렴하고 먼 우주의 한 지점과 만날 수 있다면, 박성훈의 호흡으로 탄생한 ‘씨앗’은 제1위의 무경계에 도달하는 미학으로 단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글 육상수 공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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