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화의 예술...낙하(落下)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아트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5-06-18 15:26:36
나무가 작가에게 걸어 왔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달라고 했다. ‘당신은 태고의 고통인 어머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무 많은 생각에 시간을 헛되이 했다. 모든 것이 허깨비 놀음(幼化) 지나지 않는다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일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 허깨비 놀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여기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면 무너져 사라질 현실이면 어떤가. 아니 어차피 스러질(moral) 것이라면 그냥 마음 놓고 자유롭게 낙하하자.” (작가 노트)

조각가 박미화는 낙하한다. 인간은 형편없는 존재이기에, 불완전한 생명체이기에 상승의 이유보다 낙하의 근거가 분명하다. 그래서 작가는 오늘도 낙하한다. 낙화지점이 궁금하겠지만 지금은 말 할 수는 없다.

 

▲ 박미화 작, 토르소

 

물론 처음부터는 낙하를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미술 선생님으로 살겠다는 동화적 낭만과, 대학시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은 그냥 ‘평범하게 살리라, 행복하게 살리라’라는 이유이자 수단이었다. 그래서 대학졸업과 동시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어린 시절, 남한산성 기슭의 할머니 댁을 오가며 감성도 키웠고 불교재단 여중과 가톨릭재단의 여고를 다니며 비구니를 꿈꾸고, 수녀를 흠모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엇갈리는 이해와 막연한 엄숙함, 미묘한 감성의 톱니바퀴를 맞춰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일상의 호기심으로 치부하고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를 작정했다.


알 수 없는 인생 


▲ 박미화 작,  머뭇거릴_하반위에 목탄과 아크릴릭_35x90cm,40x90cm,33x90cm_2010


맘먹은 대로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85년, 28살에 남편을 따라 미국 필라델피아로 떠나면서 박미화의 인생은 대반전의 운명을 만난다. 그곳 대학원에서 다시 미술을 공부하면서 지난 삶에 대한 깊은 회한의 시간이 시작된다. ‘모든 인생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다시 알을 깨고 나와 삶의 본질을 보게 된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가슴 치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일종의 혁명이었다.

“내 모양은 멍청해져서 움직이고 싶지도 않고 입은 다물어진 채 말하고 싶지도 않으며 내가 배워온 것도 다만 흙 사람처럼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다.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 같고 마음은 꺼진 재 같아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여 무심하니 더불어 말해볼 수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누구일까. 그만두게 그만둬.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위험 하네 위험해. 땅에 금 긋고 그 속에서 허둥대는 따위의 짓은.” (작가 노트)

 

▲ 박미화 작, 마른 풀_합판위에아크릴릭,커터칼조각_130x97cm_2014

 

그녀는 제도와 관습에 길들여져 착한 인생을 살고자 했다. 매일이 봄날이기를, 작은 행복 운운하며 한 송이 어여쁜 수선화가 되고자 했다. 이미 몸 안에는 불이 지펴지고 혀끝에는 바늘이 돋고 있는 데도 햇살 가득한 담장에 기대어 동화만 그렸다. 이 모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 삼십년이 걸렸다. 그것도 먼 타국에서, 마치 부흥회에 간 신도가 방언을 내뱉으며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듯이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까지는 진실이 아니었음을.

91년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은 멍든 몸을 이끌고 신을 부르는 무당의 전력투구와 같았다. 다르다면 신을 부르는 대신 몸의 기억을 더듬어 슬픔을 일깨우는 형상들을 불러냈다. 작가의 손에 짓이겨진 흙은 그날그날의 감성을 따라 미지의 소녀로, 사랑을 잃은 젊은 여자로, 분만의 고통으로 사는 어머니로 환생했다. 이들은 오늘의 사람이 아니고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달려와 오욕과 부당한 인간의 역사를 증명했다. 오래 전에 수장되어 화석이 된 기억의 조각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빛을 비춘 것이다. 

시간으로의 낙하 


▲ 박미화 작, 서있는_어머니


작가가 조각한 주인공들의 시선은 직시하지 못하고 곁눈질만 한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누군가를 곧바로 응시 못한다. 그들에게 상대의 시선은 두려움이고 낯설음이다. 사랑을 기다리는 자의 시선도 그렇다. 그래서 슬프고 외롭다. 코는 깎이고 이마는 패였다. 피부는 헐었고 옷은 바랬다. 목은 잘리고 자궁은 막혔다. 처진 아랫배에는 시름을 가득 담고 있다. 태초부터 이 땅의 어머니는 다 그랬다.

오늘도 작가는 낙하한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처음으로. 좀 더 일찍 낙하 못했음을 한탄한다. 매일매일 쉼 없이 그곳으로 스러진다.

“내 기꺼이 어둠의 딸이 되리라. 내 기꺼이 너희 마음을 불편하게 하리라. 황급히 숨겨두었던 너희 그늘을 내 기꺼이 들추어 보이리라. 곱고 어여쁜 자태로 무장한 너희의 푸른 어깨에 내 기꺼이 무거운 돌을 올려놓으리라. 그래서 지금이 아니라 천년의 시간이다.” (작가 노트)

첨단의 시대에 암울한 현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특별한 이상도, 고매한 이데올로기도 포함되지 않은 가장 근원적인 것, 메마른 일상에서 돌아가 쉴 수 있는 어머니의 집, 그 어머니의 체온과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낄 수 있는 어머니의 등이 우리에게 필요해서다.” 라고 설명한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생명의 출발점이고 삶의 근원이다. 어머니는 주름 가득한 피부의 껍질로 존재한다. 박미화가 빚은 여자는 모든 어머니라는 분신들이다. 그래서 같이 슬프고 같이 아프다.

나무인간의 출현


▲ 박미화 작, 어머니_85x53x157cm_잣나무_2014


작가는 공사장에 버려진 갈라진 합판에 사람을 입히고 나뒹구는 목재는 한 곳에 모아 ‘버려진 것들'에 대한 연민을 모은다. 나무와 흙은 작가를 통해 사람이 되고 동물이 되고 오브제가 되고 그리고 서술이 된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듯 그렇게 만난다.

어느 날 작가에게 나무 한 그루가 다가왔다. 잘린 다리는 벌레에게 뜯기고 몸통은 미생물에게 분해 당한 채. 작가는 썩은 가지는 도려내고 곪은 상처를 긁어내어 겨우 몸체만 살렸다. 조각이 아닌 치유를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웠다. 나무는 태고의 제사장으로 환생했다. 제사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인간 세상은 야만의 시대다’라고.

“나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삶과 그 주변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형상화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다양한 무리의 형상들은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이야기 한다.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재료와 기법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작가 노트)

놀라운 존재, 인간의 초상 肖像

작가는 끊임없이 나무와 흙을 통해 누군가를 부른다. 함께 종교를 만들고 샤머니즘을 구가하고 트라우마를 밝힌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쌓아가는 작가는 자칫 경직성에 함몰될 수도 있다. 일상의 행복을 꿈꾸던 시절에는 없던 고집과 일방성이 자신을 침하시킬 수 있다. 고립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낙하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에서 천년을 담은 전남 운주사의 와불(臥佛)과 멸망한 왕족 앙코르와트의 목 잘린 불상이 자라고 있다. 과거 같은 미래와 미완의 완성이 춤춘다. 종교적이면서 속세를 강요하고, 분명하다가 다시 모호해진다. 하지만 결국은 슬픔이다. 작가는 울어 주기를 희망한다. 메마른 세상, 아무도 적셔주지 않으면 우리들이라도 울어서 가뭄의 대지를 적시자고 말한다.
 

▲ 박미화 작,  엄마의 뜰_합판위에목탄_122x77cm_2015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자기 경험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 해 내기 보다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이해의 한 과정일 뿐이다.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보여주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작업을 통해서 내 스스로가 인간과 세상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속성을 발견하기를.” (작가 노트)

야만의 시대에 믿고 의지할 곳은 없다. 형편없는 인생이기에, 오만한 존재이기에 부조리는 더욱 겹겹이 쌓인다. 하지만 ‘과거와 엄숙한 기억’만이 용서가 되는 이 어불성설의 시대에,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어머니이다. 그들을 죽음의 형상으로 다시 불러 모은 것이 의도가 아니었다고 작가는 말 하지만, 결론은 그렇게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 시간과 기억의 형상들로. 

 

▲ 박미화 작, 얼굴1


작가는 서른 살에야 깨달은 예술이란 것을 예순의 무기력함에서도 조각하고 있다. 가난한 작가의 작업실에는 흙과 나무가 있다. 본질적 물질이다. 작가만 본질이면 작품은 절로 빚어진다. 운 좋게도 나는 시간의 원형으로 자유롭게 낙하하는 박미화를 보았다.

“모순이 존재한다. 활짝 핀 꽃이 되고 싶은가 하면, 이름 모를 곳에서 떨어지는 꽃잎인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고독 속에 통속함을 멀리하고 싶은가하면, 가장 평범한 것 속에 녹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동안의 평화와 한 동안의 혼돈은 언제나 사이좋게 반복된다.”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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