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가 예술이 되기 위한 조건

칼럼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4-07-22 18:06:05
▲ 육명심 사진가의 '장승'

 


20세기 현대 사진의 지적 비평가이자 전시 기획자인 존 자르코우스(John Szarkowski)가 1978년 7월에 미술관에서 개최한 ‘Mirrors and Windows : American Photography Since 1960’ 전시는 사진 인식과 전환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었다.

사진을 사적 표현의 수단화한 ‘미러즈’와 탐구의 방법으로 인식화한 ‘윈도우즈’로 양분해서 현재의 위치 값을 재조명했다. 사진의 정체성에 있어 타장르와의 경계성, 시대성, 차별성을 확인함으로써 현대 사진의 혼동과 침울, 불확실성과 두려움의 메시지를 남겼다.

100인의 작가, 200점을 과장 없이 가지런히 정리해 보여줌으로써 18세기 기계 발명품으로 출발한 사진이 인물화에서 사회적 비평 역할을 거쳐 사적 개념의 예술로 전이하는 일련의 추세를 직시하게 했다.

가장 후발적 예술 장르인 사진에 비추어 인류의 도구에서 시작된 최초의 장르인 공예는 과연 어떤가? 기술과 유용성은 물론 예술성에 있어서도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시장의 인식이 불투명하고 공예 스스로도 자기 모습을 정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책은 전통과 현재 사이를 오가고 있고, 전통 공예가들은 ‘윈도우즈’를 통해 과거의 시간에 매달리고 있고, 젊은 공예가들은 사적과 공적 ‘미러즈’에 얼굴을 내밀고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공예는 스스로 말해야 한다. 사적 예술을 응시하는 미러즈를 분명히 하고 새로운 예술을 선언하든지, 사물의 시대적 역할을 감당하는 윈도우즈에 둥지를 틀고 필요한 것에 대한 형식주의를 고수하든지를. 필요에 따라 타 장르에 기웃거리거나 모호한 경계에 걸쳐 양립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어설픈 감정 놀이는 예술에 가로막힐 것이고, 적당한 기능주의는 산업디자인이 삼키기 때문이다.

공예는 선언해야 한다. 일단 ‘예술’이라고. 그것도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예술이라고. 작은 항아리 한 점이 예술이 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조건은, 공예가의 서사다. 물건이 아니라 먼 시간에서 온 서사의 대상체로 국한시켜야 서사의 물꼬가 터진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모든 것이 현대 예술의 단서다. 이제 공예는 제품 설명이 아니라 서사의 전개를 위한 사물일 때, 공예는 생존과 지속가능성의 장르로 남을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언하면 된다. “공예는 예술이다”라고.

‘미러즈’와 ‘윈도우즈’는 예술이 눈과 몸의 조건이자 개념이다. 복제술로 탄생한 사진이 예술이 되기까지 200년도 안 걸렸다. 반면에 공예는 ‘세상의 처음’에서부터다. 정당성과 합리성에 사진예술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다만 나약한 언어를 구사하거나 순진한 태도를 벗겨내고 슬픔에 대한 조각을 빚는다면, 공예는 신명나는 사물의 예술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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