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부터 존재했던 건물을 개조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전시
겨울의 동유럽은 듣던 대로 살갑지 못했다. 불청객을 맞은 선술집 주인처럼 공기마저 쌀쌀맞다. 이제 막 오후 7시를 넘긴 프라하 루지네 공항의 바깥은 진작 해가 떨어져 어둑해져 있었다. 서둘러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운전기사와 간단한 눈인사만 주고받은 뒤, 대충 갈겨 찢어온 종이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Red Pif
상상보다는 조금 조용했다. 낯선 남녀가 어색함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볼륨을 높인 재즈가 흐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바닥에 낮게 깔린 피아노 소리는 옆 테이블의 대화를 그대로 실어 옮길 만큼 잔잔했다. 커다란 오크통이 테이블로 쓰이는 창가로 자리를 잡을까 했지만 중앙의 바에 앉기로 생각을 바꿨다.
자신을 ‘신나는 웨이터’라고 소개하며 한 남성이 메뉴를 내밀었다. 이름은 발렌틴이라고 덧붙였다. 그와 나 사이의 대화는 제3의 언어인 영어로 드문드문 이어졌다. 이야기의 초점은 물론 내게 맞추어져 있었다. 프라하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얼마나 머물 계획인지…. 정형화된 질문과 뻔한 대답이 두서없이 오고갔다.
동양의 여성에게 의례 베푸는 과한 친절이 불편하다고 느껴질 무렵 발렌틴이 물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우연히 잡지에서 읽었어. 와인을 좋아하나보지? 아니. 그러면? 글쎄. 핑그르르 돌아가는 저 이상한 와인병 블라인드를 직접 보고 싶었어. 분위기도 좋아 보이고. 그게 다야? 음, 재밌잖아. 여행의 첫 행선지로 와인바에 오는 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나를 향해 두 팔을 한껏 뻗으며 바의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완벽한 선택이야. 이곳만큼 좋은 여행지는 없지! 발렌틴은 마치 유명 관광지를 소개하는 가이드처럼 와인바 구석구석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19세기부터 존재했던 건물을 개조한 곳이었다. 자세히 벽을 들여다보니 당시의 페인트 자국과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갑자기 그가 무릎을 꿇고서 바닥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오크라는 나무야. 아까 우리가 앉았던 바 역시 오크로 만들었지. 아끼는 물건을 쓰다듬는 듯한 그의 손길이 너무도 진지해서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역시 멋쩍었는지 함께 웃었다. 네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었다면 좋았을 걸. 와인 시음회가 열렸었거든. 진심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공짜로 고급 와인을 마시지 못한 것보다, 수십 개의 와인병 블라인드가 모두 개방되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괜히 더 분했다.
다시 바로 돌아와 앉았다. 약간의 피곤이 몰려왔고 벽을 빼곡하게 채운 와인병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와인 선반은 포도나무 줄기를 받칠 때 사용하는 지지대로 제작한 것이라고, 발렌틴은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맥락 없이 늘어놓았다.
그는 내일 점심에 다시 이곳에 들리지 않겠냐고 물었다.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와인바의 정원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은 볼품없이 말라 있지만 여름에는 잎이 무성히 달리는 단풍나무가 멋지단다. 마땅히 거절할 구실이 없어 대충 알겠다고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모르네. 내일 와서 알려줄게. 물론,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자료제공 AI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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