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적 관점에서 본 공예의 현재

칼럼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2-02-19 23:25:07
▲ 김옥 공예가_소반

 

프랑스 사상가, 소설가인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962)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생존에서 놀이로, 노동에서 예술로 변한다고 보았다. 구석기시대에 등장한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인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도구를 발명했다. 하지만 농사를 통해 정착생활이 가능해지자 도구는 기능에서 놀이의 도구로 진화되었다. 놀이는 다시 의식을 수용하는 예술 활동으로 이어졌다.

‘공예’라는 이름

이름은 고유한 세계관을 지닌다. 사물을 본 떠 그것에 관련된 의미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는 천체・자연현상・동식물・신・인간・주거・가구 등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디자인과 함께 고작 100년의 시간 동안에 불린 이름의 ‘공예’는 아직 확고한 세계관을 담고 있지 못하고 있다. 공예(工藝)는가 장인의 예술인지, 예술을 만드는 행위인지도 애매하다. 더군다나 그 이름은 토종이 아닌 외래 낱말이어서 그 해석과 정의가 분분하고 불투명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처럼 ‘쓰임과 아름다움’에 공예의 가치를 가두어 두기에는, 이미 한 세기를 건너 온 현대공예로서는 그것의 수용이 여전히 불편하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역시 공예의 근본성보다 미술에 상응하는 상황적 담론에 머물러 있다. ‘기물’로 지칭되어 온 사물은 공예라는 새 이름에 낯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매일 펼쳐지는 공예품과 공예가에 대한 비평적 담론 또한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공예의 적확한 이해가 부실한 상황에서 현대공예는 미술의 형식적, 형태적 요소인 ‘조형’에 중심을 두고, 미술과 도구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그 근거는 공예가 기물, 조각, 순수미술로 지칭되거나 주장하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예는 왕성하고 공예가는 분주하다.


공예 비평의 기준 


▲ 채율 공예가_모란칠보 정사각터치수납장 

 

공예비평은 일차적으로 시대성, 문화성, 역사성, 지역성, 시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대성’은 공예가 동시대 삶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형편에 얼마만큼 부합하는지를 따진다. 산업, 정보, 디지털로 이어지는 시대 변화에 따른 공예의 현실성을 의미한다. ‘문화성’은 공예가 시대 가치와 지향하는 방향성을 제대로 지시하고 있는가를 가늠한다. 그 시대의 인문적 가치와 그것을 표현한 형식, 집단의식의 표본을 상징하는지 톺아본다. ‘역사성’은 공예가 전통을 수용하고 응용하는 폭과 깊이, 그리고 연속성을 관찰한다. ‘지역성’은 공예가 그 향토의 고유 물질과 주민들의 관습, 환경에 따른 삶의 형식을 이해하고 계승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시간성’은 공예 사물이 제작자의 손을 떠나 수용자에게 전달된 뒤 얼마 동안 지속할 수 있는가를 주목한다.

공예는 미술과 달리 사용자의 관리와 유지성에 따라 가치의 유무가 달라질 수 있다. 이 5가지 항목 외에 공예가의 관점이나 숙련도 그리고 삶의 태도가 비평의 단서가 된다. 작가의 이력, 작업 동기, 공예의 이해도를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오가며 분석한다.

디지털경제에서 디자인 산업의 패러다임, 첨단의 기술, AI, 메타버스로 이어지는, 가히 혁명적 변화시대에 공예는 어떤 양식과 지시어를 제시해야 하는 것인가? 경매장에서 24억에 낙찰된 조선 달항아리와 백화점의 만 원짜리 도자 잔 사이에 오늘의 공예가 있다. 또 현대공예는 확장하는 데 비례해서 공예가라는 이름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의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식해왔던 생활 공예품이었던 도끼, 톱, 홍두깨, 됫박, 고무신, 초롱불, 바가지, 물레, 짚신, 베틀 등은 향토유물관이나 기억에 박제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예는 전통과 근대를 거치면서 현재에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공예가 ‘내일의 공예’로 이어질지 그것 또한 명료하지 않다.


소이연(所以然), 소당연(所當然)


▲ 최준우 공에가_ 사방탁자

 

'쓰임과 아름다움'으로 해석되는 공예라 하더라도 그것의 의미 해석에 따라 수공품, 디자인, 패션, 명품으로 대체될 수 있고 혹은 조형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의 가장자리에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장소에서 특이한 형식과 모호한 메시지로, 1년에 400회 이상 열리는 공예전시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술의 억압적 의미성에, 산업디자인의 물량 공세에 지친 대중에게 공예만의 여백이 긴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예의 정의는 여전히 미숙하고 다분하다. 새물결은 일고 있는데 목적지는 명확하지 않다.

개인기에 의지하는 현대공예는 디자인 산업처럼 만인을 위한 장르가 될 수 없고 또 시대와 체제, 종교, 철학을 마주하는 미술일 필요도 없다. 단지 결과물에 이르는 수행 과정을 통해 공예가 스스로 충만의 기쁨과 배려의 안위를 느낄 수만 있다면, 이는 그 어느 장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공예, 공예가만의 세계가 될 수 있다.
공예비평은 평가보다 모색의 방향을 명시해야 한다. 사물의 이치와 에너지로 현재까지 존속해온 공예는 소이연(所以然, 그렇게 되는 까닭), 소당연(所當然,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실체)의 증거물이다. 그러나 소이연이 아트에 유입되고, 소당연은 디자인 산업에 의해 재구성되는 변화를 겪었다. 몸통은 분산되고 정신은 흡수당한 공예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변방으로 내몰리게 한 스스로의 책임도 있다. 하지만 그 생명력이 완전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근거는 공예가 아름다운 삶을 회복하는 데 있어 적절하고 적합한 수단임을 비평은 제시해야 한다.

현대공예의 이해와 평가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공예의 지속성과 확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최근 공예전의 서문에 열거되는 반복적 언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 조형, 오브제, 추상, 구상, 소통 등이다. 이는 전적으로 미술계의 전유물로 이미 낡은 언어로 취급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공예 전시 글에서 그 낱말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미술로 편입하려는 저의가 있다. 공예가보다 ‘작가’라는 호칭에 익숙해 하려는 현상에서 미술의 언어를 포식하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다. 작업의 태도보다 개념에 집중한 결과다. 이는 공예라는 이름을 탈각시키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사물 그 자체보다 사물의 대상화에 치우쳐 기물의 기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공예의 이름을 지우게 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공예 비평의 속성

필기구의 대명사인 만년필은 타자와 좌판의 등장으로 쓰임의 용도는 점점 소멸하고 있다. 만년필의 기본은 튜브에 잉크가 지속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잉크가 마른 만년필은 유의미한 공예가 될 수 없다. 요즘의 공예도 만년필처럼 실용을 제한하고 장식과 조형의 형태를 띠는 것은 일견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다. 문제는 미술적 공예를 지향하는 작가의 의식이 미술화에 충분히 대처하고 있는가에 있다. 평론은 사물에 기초해 해석하는 방법과 공예가의 의식구조를 들여다보고 세계관을 담아내는 방법을 취한다. 미술적 태도에서는 사물의 기능을 애써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공예는 사물의 이해에 무관심할 수 없다.

 

▲ 양정모공예가__정모승연 작품

 

공예는 사물의 존재 위에 놓인 무형의 정서다. ‘있음-없음’, ‘없음-있음-없음’의 관점에 따라 생명의 근원이 달라지듯, 공예도 사물의 존재와 부존 유무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 화자(제작자)와 청자(소비자)의 자리에 따라 공예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나눠지기도, 일체화되기도 한다.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손잡이 대신 터치 방식의 손잡이가 대중화되면서 화자는 소멸하고 청자의 관점만 남는다. 체(體)는 사라지고 용(用)이 중심에 자리한다. 산업화의 결과는 계속해서 공예의 자리에 침투할 것이고 그럴수록 공예는 점점 미술의 경계 쪽으로 다가가게 된다. 공예가 조형과 형식에 집착하는 이유가 생존의 조건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득이 부족하다. 이야기의 구조도 함께 내포해야 한다. 형식이든 이야기이든 ‘있고-없음’의 교차 속에서 현실과 개념이 일체화를 이뤄야 한다.

현대공예의 비평에서 주안점은 공예가의 몸부림을 발견하는 일이다. 기술과 경험은 그 다음이다. 왜 공예를 하는가, 공예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어떤 공예를 추구하는가 등의 질문 속에 한 시대 공예가로서의 덕목과 삶의 태도, 생각의 저변을 통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때로는 언어에서, 때로는 태도에서 우러나는 공예가의 아우라는 미술과 기술자의 그것과 다른, 공예가만의 독특한 체취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판단 이전에 삶으로부터 전해지는 질박함이 공예평론의 측정 지수다.

 

▲ 서현진 공예가_ 우산

 

현대공예의 비평에서 주안점은 공예가의 몸부림을 발견하는 일이다. 기술과 경험은 그 다음이다. 왜 공예를 하는가, 공예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어떤 공예를 추구하는가 등의 질문 속에 한 시대 공예가로서의 덕목과 삶의 태도, 생각의 저변을 통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때로는 언어에서, 때로는 태도에서 우러나는 공예가의 아우라는 미술과 기술자의 그것과 다른, 공예가만의 독특한 체취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판단 이전에 삶으로부터 전해지는 질박함이 공예평론의 측정 지수다.

공기(空器)는 속이 비어 있는 그릇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도구의 형식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세계관이다. 그 사물을 만드는 이는 그 이치에 순응해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 이미 세상의 모든 기물은 탄생의 의미를 지정하고 있다. 그 자리에 산업이 들어와 대량으로 생산・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 자리를 내어준 공예는 사물의 이치를 삶 그 자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사물 너머의 가치를 발견, 공유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자칫 미술의 한 형태로 오해할 수 있으나 본질은 엄연히 다르다. 현대공예는 사물의 궁극적 목표를 정신으로 옮겨 생활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와 탄생의 속성을 규명하려는 태도가 바로 ‘몸부림’으로 이어져 독자성을 이뤄가야 한다.

비평은 바르게 가늠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론 비평, 실천 비평, 객관성 비평의 관점에서 일반적 작가의 시점도, 비평가의 메마른 평가도 아닌 사물이 지향하는 방향을 오차 없이 안내하는 일이다. 한 해에 400회 이상 전시되는 공예전의 전시 서문이 드물고, 소개 글의 내용은 견강부회와 상투적 언어가 반복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예 자체의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다른 장르의 형식을 끼워 맞추는 데서 그 원인이 있다. 또 단어의 맥락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구사하다보니 번역체와 비문이 남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보는 ‘앎’이고 이야기는 ‘모름’에 있다. 이야기는 한 개인의 잠재적 의식이어서 그 구조가 복잡하고 연결이 쉽지 않다. 특히 작품에 대한 내러티브는 공예가 스스로도 그 규명이 모호하며 간단하지 않다. 비평은 그 근원으로 스며들어가 무의식의 세계를 읽어내는 행위다. 최대치로 습득한 작가 의식을 펼쳐두고 찬찬히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이 일정하지 않듯 공예가의 진실도 옮겨갈 수 있음을 직시하고 단계를 만들어 전하해야할 때도 있다. 미술평론과의 차별은 사물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어서 개념과 실용이라는 이중적 나선형 구조를 가진다. 밥공기처럼 이미 고정화된 형식을 고려하면서 그것과 상관을 이루는 내용을 담아야 공예비평의 바른 지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의 공예

공예를 정의하는 일은 공예가와 소비자 혹은 비평가에 따라 일치할 수도 나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성으로 이해되는 공예 상식은 적재적소에서 ‘적당함’과 ‘적절함’으로 삶을 일구고 공유하는 매우 정직한 장르다. 평론가 최범은 “한국 현대공예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서구의 공예가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두 가지의 변용이 이 땅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미술화(fine art-ification)와 산업화(industrialization)이다.”라고 주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물이라는 이름 대신 명명된 ‘공예’는 관조와 놀이, 취향과 놀이, 기능과 미술의 경계를 쉼 없이 오가고 있다.

삶을 타자의 그림자놀이이면서 환상 그 자체로 인식한다면, 빙하기에 탄생한 도구의 역사는 현대공예의 극히 일부에 한정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야 하는 공예는 현재 은일(隱逸)한 상태에서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공예가는 일기장에 자기 언어를 적어 내려가고 있고, 칼은 식당의 도구로 혹은 무당의 제례의식에 기호로 존재한다. 조선백자의 미술적 환대와 막사발의 정서도 여전하다. 기계·기술의 발전과 순수 노동의 가치가 대칭하고 있고, 내장을 끊어내는 득음 앞에 스피커의 증폭 능력은 점점 높아진다.

동일성 미학의 너머에는 차별성의 아름다움이 있고, 다시 그 너머에는 무경계의 미학이 불립문자로 기다리고 있다. 공예의 기원을 규명하기보다, 미래로의 규정이 시급한 것이 오늘날의 공예 처지다. 평론은 그 시류의 한 부분에 매달려 있다.

 

▲ 김영찬 공예가_ CH-It04m(데스크&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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