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무엇으로 사는가?

칼럼 / 강진희 기자 / 2023-11-26 21:54:51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장만옥에 대한 애절하고 답답한 마음에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며 하는 말이 있다. “중국의 어느 마을에는 이런 풍습 있네. 비밀이 생겨서 답답한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을에 있는 큰 산에 올라가 마음에 드는 나무 한 그루를 골라서 그 나무옹이에 입을 대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고 진흙으로 막고 내려오는 풍습 말일세.” 그러고는 양조위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다.

영국에서 4년 동안, 20대 초반에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온 정신과 온 몸을 던졌다. 귀국하기 전날 맥주 4캔과 아몬드, 스케치북을 들고 공원에 일광욕을 하던 중 문득 화양연화의 양조위의 대사가 생각났다. “나도 한 번 해볼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마음에 드는 나무를 찾아 그린파크를 어슬렁거렸다. 조금 창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일이면 바다 건너 모국으로 떠날 사람 아닌가.

잎사귀도 별로 없는 볼 품 없는 나무가 눈에 띄었다. 풀숲을 헤치고 그 나무에 다가갔다. 옹이를 찾아서 손을 모으고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처음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몇 번 반복해서 하다 보니 좋아졌다. 나무 냄새와 그 안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생각보다 내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서 처음엔 깜짝 놀랐다. 나이테가 물보라가 되어 목소리를 울려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비밀을 말했다.

나무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을 때 에덴의 사과나무가 목격했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칠 때 그 뒤에는 보리수나무가 있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의 결의를 한 곳도 복숭아나무가 아래였다. 나무는 모든 것을 보고 들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서서 또 다른 이의 비밀을 기다린다.

다시 영국에 돌아가게 된다면 그 나무친구부터 찾을 거 같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비밀들을 한보따리 풀어놓을 것이다. 나를 보면서 ‘기다리길 잘 했어’ 라며 환하게 웃어줄 나무를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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