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공방 농암예가...예를 담는 찻상

공예 / 박신혜 기자 / 2025-04-07 22:10:26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닌 정신이다. 농암 박봉규 선생은 차(茶)를 예로 알고 다도(茶道)를 따른다. 정성으로 빚어내는 찻상은 그만큼 고운 결을 가졌다.

36년 전, 농암 선생은 밥상 다리를 나지막하게 잘라 첫 찻상을 만들었다. 차 맛이 무엇인지 차를 다루는 도구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찻상은 세월이 지날수록 견고해지고 차 맛은 진해졌다. 그의 작품에서는 오랫동안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향기가 난다.

오래된 것에 귀를 기울이다


 

그는 차에 대해서도, 나무 다루는 법에 대해서도 따로 배운 적이 없다. 그에게 스승이 있다면 오랜 시간 동안 허물어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 온 건축물이나 오래된 탑일 것이다. 건축의 기둥, 탑의 선은 그에게 말을 건넨다. 그들은 조근 조근 자신들이 딛고 선 땅의 오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선시대 지어진 곡선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고려시대는 선은 그보다 두 톤 낮은 묵직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는 그 이야기를 반나절 정도 끈기 있게 듣다가 그림으로 옮긴다. 완벽한 그림이 완성하려면 끊임없는 스케치를 거쳐야 한다. 6년 전,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나가던 그를 붙잡았다. 석탑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는 오래된 탑을 다실의 등으로 옮겼다. 목조건물의 형식을 따르는 백제시대의 석탑은 세월이 흘러 다시 나무로 태어나게 되었다.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곳, 무송헌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목공소 한 쪽에서는 진을 빼기 위해 양잿물에 담긴 나무가 쌓여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나무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그는 나무를 길들이기 위해 태움질을 택했다. 건축을 하면서 익히게 된 태움질 기법을 찻상에 적용한 것이다. 나무를 태우면 화가 난 듯 거친 표면만 남는다. 또는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듯 휘어지고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무를 길들이기 위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셀 수 없는 나무를 태우고 벗기는 과정을 지나 결국 그는 마감을 하지 않아도 나무의 결이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소나무는 결이 아름다워 태우면 눈부신 원목으로 환생하게 된다. 밋밋한 가구를 꾸미기 위해 나무를 태워 문양을 새겼던 예전에는 주로 오동나무와 은행나무를 사용했다. 소나무는 얇게 켜기 어려워 다루기 힘든 목재였지만 시간이 지나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졌다. 자신의 작업실을 무송헌(撫松軒)이라 이름 붙인 그에게서 소나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농암의 차, 예를 말하다



그의 다실에 절대 빠지지 않는 공간이 있다. 귀한 사람에게 차를 바치는 곳 즉, 헌다(獻茶)할 수 있는 장소다. 헌다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다도에 대한 엄격한 예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올리는 것은 모두 헌다이고 헌다하는 곳은 집안의 중심이 되니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고치게 된다. 목마름을 달래주는 차 한 잔이 정신을 채우고 마음을 다듬는다. 예를 갖추니 차의 향이 더욱 깊어지고 맛이 그윽해졌다.


농암과의 대화 속에는 늘 차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연잎에 정성스럽게 싸놓은 차를 우렸다. 차를 감싸고 있던 연잎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태움질을 거치고 살아남는 나무는 잎을 딸수록 무성해지는 차나무와 닮았다. 그의 다실은 잃을수록 더 많이 얻고 버릴수록 풍성해지는 존재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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