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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공예가들의 전시 '공예이기'(2023, 아트스페이스3 갤러리) |
프랑스 사상가, 소설가인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962)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생존에서 놀이로, 노동에서 예술로 변한다고 보았다. 구석기시대에 등장한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인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도구를 발명했다. 하지만 농사를 통해 정착생활이 가능해지자 도구는 기능에서 놀이의 도구로 진화되었다. 놀이는 다시 의식을 수용하는 예술 활동으로 이어졌다.
‘공예’라는 이름의 속성
모든 이름은 고유한 세계관을 지닌다. 공예라는 이름은 일본산 외래어다. 디자인과 함께 고작 100년의 시간 동안에 불린 이름의 ‘공예’는 아직 확고한 세계관을 담고 있지 못하고 있다. 공예(工藝)가 장인의 예술인지, 예술을 제작하기 위한 수단인지가 애매하다. 일본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처럼 ‘쓰임과 아름다움’에 공예의 가치를 가두어 두기에는, 이미 한 세기를 건너 온 현대 공예로서는 그것의 수용이 불편하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또한, 공예의 근본성보다 미술에 상응하는 상황적 담론에 머물러 있다. ‘기물’로 지칭되어 우리의 사물은 공예라는 새 이름이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다. 그 근거는 공예의 의미와 범주가 불명확해서다. 공예의 적확한 이해가 부실한 상황에서 현대 공예는 미술의 형식적, 형태적 요소인 ‘조형’에 기울어 미술화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공예는 왕성하고 공예가는 분주하다.
공예의 범주와 이해
공예는 노동의 산물이다. 시대성, 문화성, 역사성, 지역성으로 점철되는 공예는 생존을 위한 도구에서 출발했다. 노동은 몸의 감각과 노고의 무형 운동이다. 인간의 팔과 다리와 손이 골절 구조로 이뤄진 것은 노동에 최적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공예가 제사장과 귀족의 권위를 상장하는 것이라 해도, 그 근본은 오로지 노동의 신성함에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산업, 정보, 디지털로 이어지는 시대 변화에 따라 공예 또한 그 역할과 의미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공예는 미술과 달리 사용자의 관리와 유지성에 따라 가치의 유무가 달라질 수 있다. 공예가의 관점이나 숙련도 그리고 삶의 태도가 가치 판단의 단서가 된다. 공예가의 이력, 작업 동기, 작품의 이해도는 공예의 지속성을 결정할 것이다. 디지털경제에서 디자인 산업의 패러다임, 첨단의 기술, AI, 메타버스로 이어지는, 가히 혁명적 변화 시대에 공예는 어떤 식으로든 양식과 지시어를 제시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다.
50억에 낙찰된 조선 달항아리와 백화점의 만 원짜리 도자 잔 사이에 오늘의 공예가 있다. 공예는 번성하는 데 공예가는 줄어들고 있다. 전통의 생활 도구였던 도끼, 톱, 홍두깨, 됫박, 고무신, 초롱불, 바가지, 물레, 짚신, 베틀 등은 향토유물관에 박제된 지 오래다. 전통과 근대를 거치면서 공예는 점차 자기 소멸을 앞당기고 있다. 여기에 오늘의 공예가 ‘내일의 공예’로 이어질지 그것 또한 명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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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최초의 도구, 돌도끼 |
공예의 재구성
'쓰임과 아름다움'으로 해석되는 공예는 의미와 해석에 따라 수공품, 디자인, 패션, 명품으로 나뉘거나, ‘조형’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의 가장자리에 남을 수도 있다. 1년에 400회 이상 열리는 공예전이지만 자기 자리는 여전히 좁다. 하지만 미술의 억압적 개념과 첨단 기술의 산업계 물량 공세에 비례해서 몸의 감각은 사물의 고유성에 갈망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예가의 개인기에 의지하는 공예는 디자인 산업처럼 만인을 위한 장르가 될 수 없고 또한, 작가의 에고적 개념에 몰입해 매일 새로운 형식을 갈망하는 미술일 필요는 없다. 몸의 수행 과정을 통해 공예가 스스로 충만의 기쁨과 배려의 안위를 느낄 수만 있다면, 이는 그 어느 장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공예, 공예가만의 세계가 될 수 있다.
공예는 자기 모색을 분명히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물질의 근원을 파헤치고 사물의 이치와 기운을 바탕으로 소이연(所以然, 그렇게 되는 까닭), 소당연(所當然,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실체)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몸통은 분산되고 정신은 흡수당한 공예는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운동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물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현대 미술은 조형, 오브제, 추상, 구상, 소통 등의 미술적 언어를 배척하고 어루만지지만, 현대 공예는 움켜잡다, 집다, 끼다, 문지르다, 보듬다, 빚다, 매만지다, 다듬다, 채다 등의 동사형 체계를 세워야 한다. 또한 닳다. 이어지다. 갈라지다, 반질하다. 터지다, 부풀다, 깎이다, 흠집 나다 등의 형용 언어를 가까이해야 한다. 공예가들이 ‘작가’라는 호칭에 익숙해지려는 현상은 미술의 언어를 포식하는 의도로 비칠 수 있다. 작업의 태도보다 개념에 집중한 결과다. 이는 공예라는 이름을 탈각시키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사물 그 자체보다 사물의 대상화에 치우쳐 기물의 기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공예가의 태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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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택 작 'Creating a Void' |
공예의 재발견
공예는 사물의 존재 위에 놓인 무형의 정서다. ‘있음-없음’, ‘없음-있음-없음’의 관점에 따라 생명의 근원이 달라지듯, 공예도 사물의 존재와 부존 유무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 화자(제작자)와 청자(소비자)의 자리에 따라 공예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나눠지기도 하고 일체화되기도 한다.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손잡이 대신 터치 방식의 손잡이가 대중화되면서 화자는 소멸하고 청자의 관점만 남는다. 산업화의 결과는 계속해서 공예의 자리에 침투할 것이고, 그럴수록 공예는 점점 미술의 경계 쪽으로 다가가게 된다. 공예가 조형에 집착하는 이유가 생존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설득되지는 않는다.
이제 현대 공예는 공예가의 몸부림을 발견하는 일이다. 기술과 경험은 그다음이다. 한 시대 공예가로서의 덕목과 삶의 태도, 생각의 저변을 통해 공예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는 일이다. 때로는 언어에서, 때로는 태도에서 우러나는 공예가의 아우라는 미술가와 기술자의 그것과 다른, 공예가만의 독특한 체취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공기(空器)는 속이 비어 있는 그릇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도구의 형식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세계관이다. 그 사물을 만드는 이는 그 이치에 순응해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 이미 세상의 모든 기물은 탄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술과 산업의 물량 공세가 거칠수록 공예는 사물의 이치를 삶 그 자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사물 너머의 가치를 발견, 공유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미국 미술사학자 조지쿠블러(George Kubler)의 저서 <시간의 형상>에서 사물의 역사에를 두 가지로 정의했다. 하나는 작고 고립된 사회에서 빙하처럼 느리게 바뀌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빠르게 바뀌는 방식으로서 서로 관련 없는 곳에서 동시에 타오르며 먼 거리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산불에 비유했다.
현대 공예는 비록 느리겠지만, 사물의 궁극적 목표를 정신으로 옮겨 생활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와 탄생의 속성을 ‘몸부림’으로 대체해서 독자성을 이뤄갈 때, 공예는 지속성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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