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나무 숲에 둘러싸인 자이펜은 전형적인 농가 풍경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면 고요한 가운데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불빛…. 여느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이곳을 품고 있는 에르츠 산맥이 풍부한 광물자원으로 유명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자이펜은 한때 광산마을이었다. 그러나 1750년대부터 광산업이 하향 산업이 되자 마을 역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이펜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과 같은 명소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목공예 마을’이라는 확실한 대안을 찾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목공예 마을의 탄생
현재 자이펜에는 50여 개의 공방이 있는데, 이들 공방은 저마다 개성을 뽐내며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자이펜이 명실상부한 목공예 마을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곳에 내려오던 풍습이 한몫했다. 자이펜에는 성탄절이 되면 창가에 인형을 놓아두는 풍습이 있었다. 아들이 있는 집은 광부 인형을, 딸이 있는 집은 천사 인형을 창가에 장식했다. 이러한 풍습이 면면히 이어지면서 오늘날 목공예 마을이 될 수 있는 단초가 열렸다.
또 하나. 자이펜 근방에는 가문비나무 숲이 우거진데, 가문비나무는 나뭇결이 아름답고 건조가 빠르기 때문에 목공예품 제작에 안성맞춤이다. 이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마을에서 벌목과 식재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도 무분별한 채취가 지역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상처로만 머물렀을 수도 있는 폐광의 아픔을 자이펜 주민들은 딛고 일어섰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목공예품에 지역의 전통과 뿌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예컨대 뮐러의 대표적인 제품 슈빕보겐(schwibbogen)은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해 과거를 따뜻하게 추억한다. 지나간 시간을 잉태해 새로운 미래를 낳고 있는 자이펜, 그것이 바로 목공예 마을로 재기할 수 있었던 성공의 비결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공정
자이펜 마을에 있는 수많은 공방 중에서도 뮐러는 113년이라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1899년 에드문트 오스왈트 뮐러가 창업한 이래 2대 파울 뮐러, 3대 귄터 뮐러를 거쳐 지금은 4대 링고 뮐러가 가업을 물려받았다. 전 세계 1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뮐러는 역사가 유구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언제나 다양한 제품을 폭넓게 선보여 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신선한 아이디어가 접목돼 만들어진 뮤직 박스, 피라미드, 촛대 인형, 아로마 인형, 호두까기 인형 등 뮐러만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긴 목공예품은 비단 뮐러뿐 아니라 자이펜 마을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런 점에서 뮐러에서 출시하는 제품은 단순히 나무를 깎고 다듬어 만드는 일반적인 목각인형이 아니라 예술품의 반열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까다로운 목재 선택 기준을 고수하는 뮐러의 원칙이 숨어 있다. 뮐러는 기본적으로 옹이가 적고 결이 매끄러운 나무를 선호한다. 또한 색이 맑고 고와야 한다. 휘거나 굽은 나무는 당연히 일차적으로 제외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함수율. 이곳에서는 함수율 6% 이하인 나무만 사용한다. 함수율은 목재의 강도를 비롯해 변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구의 함수율이 10%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훨씬 낮은 함수율이다. 이는 뮐러에서 생산하는 목공예품이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부품들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결구 방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각 부품은 정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제작 후 밀리미터 단위의 변형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습도 측정기 등 최신식 설비를 사용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공정이 이뤄지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전 공정의 부품 규격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다. 3천여 가지나 되는 모든 부품을 이렇게 자체적으로 생산하니, 그 수고로움과 정교함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따뜻한 꿈을 담은 디자인
뮐러의 모든 제품은 최소한 1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장인의 손끝에서 나온다. 매일 8시간 동안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고 색칠하는 과정은 어찌 보면 단순 노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뮐러의 장인들은 그 노동을 전혀 지루해하지 않는다. 나만이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에 예술품을 만든다는 긍지가 더해져 오히려 기쁨을 느낀다.
“내 기술과 작업이 목공예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이야말로 최고의 기술력”이라는 링거 뮐러 대표의 말이 무색하지 않은 대목이다. 현 링고 뮐러 대표의 아버지인 3대 귄터 뮐러 역시 뛰어난 장인이다. 그는 경영을 아들에게 물려준 후에도 아직까지 현장에 남아 제품 제작에 참여한다. 장인 경력 50년이 넘어야 받을 수 있는 골든 마이스터(meister) 증서를 독일 정부에게 받았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할까. 특히 그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중시하는데, 피라미드 회전목마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뮐러를 보면 성공하는 기업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직급이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제품에 대한 생각을 격의 없이 주고받는다. 뮐러에만 있는 독특한 기업문화는 이뿐이 아니다. 링고 뮐러 대표는 매월 1회 전 직원을 모아놓고 경영 보고를 한다. 이때 매출이 올랐으면 그 공을 직원들에게 돌려 보너스도 지급한다. 여간해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에 대해 링고 뮐러 대표는 “직원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주인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직원들은 직원들대로 회사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또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더 놀라운 건 A/S를 담당하는 사람이 말단 직원이 아니라 회사 대표라는 사실. 소비자로부터 접수된 제품 개선 요구서에는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이 기술돼 있어, 이를 통해 소비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링고 뮐러 대표는 판매한 물건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또한 소비자의 마음을 보다 가까이에서 읽기 위해 A/S를 자처한다고 말한다. 초발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폐광으로 인한 절망과 상처 대신 희망과 따뜻함으로 미래를 개척했던 자이펜 사람들, 그리고 나무에 열정과 꿈을 담아내는 뮐러의 장인들. 그들에게 목각인형은 그 자체로 한줄기 희망이며 빛이었다. 그래서 뮐러의 목공예품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이토록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게 아닐까.
사진 제공 ㈜비토엘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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