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우답(愚問愚答)... 2022 공예트렌드페어 후기

공예 / 편집부 / 2023-01-02 12:15:47
▲ 2022 공예트렌드페어 3주제관

 

‘2022 공예트렌드페어’의 주제는 ‘현실의 질문, 공예의 대답’이었다. 페어의 중심이 되는 주제관 공간은 세 가지 사회 문제에 공예가 답을 하는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첫 섹션의 질문과 대답은 ‘인간성 상실-지역과 전통의 재해석을 통한 문화적 다양성의 대안인 공예’였다.

질문과 대답? 복잡한 현실을 교과서같이 떨어지는 한 가지의 답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와 공예가 본질적으로 그러한 질문에 명료한 처방을 해주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인간성의 상실: 획일화, 몰개성화, 정형화된 삶이 공예의 전통성과 다양성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순진함이 과연 2022년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공예가 보여줘야 할 모습이었을까.

하나의 질문에 억지로 끼워 맞추듯 작품을 묶어 놓으니 모든 게 미끄러진다. 장인 정신이 들어갈수록 몰개성화, 획일화와는 멀어지고 인간성이 회복된다는 기획자의 결론은 그 옆 관에 위치한 ‘자연환경의 파괴’라는 질문에 그 해답으로 제시한 생분해 성분을 이용한 3D 프린팅 작품은 인간성의 상실인가 하는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그럼 그 옆 옆관에 있는 인간의 순수한 노동 가치가 발휘된 작품들은 반대로 자연환경 파괴인 것인가? 

 

맥락은 그물이다. 선이 아니다. 두 점의 작품은 하나의 선이 아닌 그물로 덮어야 하는데 선으로 연결하려고만 하니 그 한 줄 밖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서 오류가 일어났다. 맥락이 부족하니 텍스트 안에서 작품끼리 서로 부딪히고, 작품은 자신보다 작은 텍스트에 몸을 욱여넣다가 결국 메시지를 상실해 버린다.

 

▲ 2022 공예트렌드페어 1, 2주제관 전경


‘인간의 손 vs 기계의 손’, 공예란 무엇인가?

매년 열리는 페어는 그 해의 혹은 그 시대에 관한 질문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공예 페어에서 설정한 ‘현실의 질문=인간성 상실’이라는 간단한 수식은 서점에서 검색한 ‘현대사회’라는 책 한 챕터의 구절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사실 인간성 상실, 획일화된 일상은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톱니로 빨려 들어간 1930년대부터 이미 질리도록 논의해온 문제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이 2022년까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인간성 상실’과 ‘획일화된 일상’을 몸으로 느끼면서 사는가? 그리고 그게 우리의 삶에서 변화한 적이 있었는가? 동시대를 계속해서 과거를 빌려 설명하려 하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

‘인간성 상실’이라는 키워드 하나에서도 무수한 질문들이 충분히 쏟아져 나올 수 있고 적어도 페어의 주제관이라면 더 구체화된 문제의식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의 질문’이라고 제시된 세 가지 질문들은 지금 우리 현실의 질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공예는 이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차라리 공예가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스스로 답하게 하는 게 낫지 않은가? 공예는 곧 작가를 통해서 생산되니 대답보다는 질문에 가까운 예술이다. 그저 ‘현대사회’의 현상 하나를 뽑고 거기에 공예가 답한다는 그런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다.

 

 

공예의 당위성과 동시대적 존재 이유

신소재는 과연 정말 우리 삶에 필요한 ‘신소재’인가? 신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곧 공예의 당위성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환경오염을 우리의 피부로 느끼며 무엇을 새롭게 생산하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시대에 궁극적으로 더 많은 소재를 개발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지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인간의 손을 기계가 대체해 전통적인 공예의 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디지털 크래프트는 신소재, 친환경과 같은 보기 좋은 말에 숨어 그린워싱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그 반대편에서 인간의 땀과 시간이 담긴 전통적인 공예의 속성을 자랑하는 작가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변화된 시점에서 ‘사람의 손맛’보다는 더 설득력 있는 작업의 이유를 내놓아야 한다.

 

전통성과 현대성이 교차되어 혼종된 양상을 보이는 지금의 공예가 그저 기존의 정의에 기대, 혹은 새로움이라는 착각에 기대 아무런 반문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길을 잃고 분열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공예인지 혹은 그저 잉여의 생산물인지 스스로 자신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나는 작품 하나하나의 퀄리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쁘게 붙여지지 않는 시트지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전시의 퀄리티를 결정한다고 믿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가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유명한 감독이 되어 결정한 키워드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올해 공예란 무엇인가, 내 작품은 이곳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치열하게 반문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페어를 완성하기 위해 1년 동안 고생한 작가들에게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를 보내며 앞으로 공예가 어디에 빗대지 않고 그 이름으로서 곧게 설 수 있길 바란다.

글 정다경 미술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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