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가구>전 아트퍼니처작가 정명택. ‘둠’(Deposition),,, 역사로부터 추출한 사물의 기척

아트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3-10-14 12:53:34

 

오랜 역사를 거쳐 한국인들은 삶의 이상적 가치를 지향하며 자연 재료를 있는 그대로 사용한 ‘순수함’, 불필요한 기교적 과시를 배제한 ‘담백함’, 그리고 자연과 동화되어 하나를 이루는 ‘조화로움’을 추구하여 왔다. 이러한 자연주의 정신은 시간의 축척과 함께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한국 문화의 독자적인 면모이자 한국인의 깊은 성정(性情)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자연주의 정신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공간인 한국 고건축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인위적인 구성보다는 자연친화적 구성을 보여주는 한국 고건축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창출하는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자연과의 소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고건축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 나아가 한국 예술의 특색을 크게 ‘무위(無爲)의 순수미’, ‘무심(無心)의 담백미’, ‘무형(無形)의 공간미’로 바라본다. 

 

십여 년 전 어느 유월 새벽, 밤안개가 자욱한 경주 구황동에 도착하였다. 광활한 벌판 위에 펼쳐진 무성한 갈대밭을 가로질러 신라시대의 사찰 황룡사 터에 남아 있는 석물(石物)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1500년 전 신라시대 최 전성기에 있었던 웅장한 건축물들은 사찰 터의 면적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큰 규모였을 테이지만 지금은 역사의 잿더미 속에 그 형체는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초석(礎石)들만 남아 쓸쓸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의 풍파로 마르고 닳은 이 초석들로부터 나는 선지자(先知者)의 마음으로 영감을 구하고자 온 몸의 세포를 감각하였다.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하던 커다란 초석들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의 눈과 상상을 통하여 사물과 인간, 형태와 소리, 시간과 공간사이를 오가며 무한한 무위 세계에 빠져들었다. 인간이 상징적 사물을 만들어 특정한 자리에 두는 행위는 그 자리에 대한 함축적 의미와 공간적 경험을 부여한다.1500년 세월을 한자리에서 지켜봤을 석물. 그 속에 담겨있는 인간의 의지와 흔적들을 살피며 사물과 내 자신은 어느 순간 하나가 되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침묵 속에 놓여 있는 작품 ‘둠(Deposition)’은 무위의 상태를 대표한다. 사물과 공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탐구로서 인간이 사물을 특정한 장소에 두는 행위, 그것이 갖는 시‧공간의 의미를 표면화 하면서 황룡사지 석물의 내용과 형식을 재해석하였다.

갈라지고 마모된 육면체의 덩어리들은 인간의 활동(무위), 정신 또는 욕망(무심), 형상(무형)이라는 세 가지 상태의 부재를 철학적 주제로 담고 있다. 인간이 사물을 만들고 특정한 장소에 두는 과정에 강제로 개입하지 않고 사물 자체에서 스며 나오는 자연스럽고 자생적인 정신을 표현하려고 집중하였다.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사물과 공간의 어우러짐은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로 융화되면서 묵직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독특한 시·공간적 특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황룡사지 석물들의 규모를 살펴보고 각 석물들이 가지고 있는 비정형의 형태, 공간과 배치, 표면 질감 등을 해석하며 작품의 원형을 제작하였다. 작품의 원형은 청동으로 주조되고 나를 통해 황룡사지 석물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용접하고, 갈아내고, 색을 입히고 벗겨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며 제작한 금빛의 청동 벤치를 통해 마침내 광활한 공간 속에 사물이 자리한 ‘데’와 ‘둠’을 구현할 수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물들의 기척을 이끌어내며 사물과 공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자유로이 탐구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글: 정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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