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매너 체험공간’이라는 낯선 건축물. 제주 오설록 티스톤은 오랫동안 이곳에 자리했던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느낌을 준다.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조민석과 홍동희, 이이남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라는 안도감이 든다.
동서양 소나무가 놓인 풍경
추사가 남긴 그림 한 점(작가 이이남의 모니터)을 앞에 두고 건축물 티스톤을 번갈아 관찰한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훼손된 원형의 찬바람이 지하 차 수장고 통로를 타고 흐른다. 이곳에 건축물이 있고 없고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100% 오설록은 우리 전통차를 기념하는 일이다. 그리고 차를 축복하는 시간이 차고 넘칠 때쯤 티스톤은 절로 건축되는 법이다. 오설록에 가득한 차반이 주는 위용 때문이다. 차밭의 부속건물이라 칭한다고 해도 그것마저도 엄청난 찬사가 되는 곳, 이곳이 오설록 티뮤지엄이다.
현무암 톤의 각진 콘크리트 건물은 큰 장을 매달고 어김없이 차밭을 수식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차반이 있었는지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제주는 녹색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푸른 공간, 녹차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좋은 창조 공간 티스톤은 사람과 사물을 모조리 나무 위에 앉혔다.
티스톤에 들어서면 우리 또한 나무 디자인이 된다. 생태적으로 아름다운 사람, 우리의 변신은 나무 공간 안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녹차가 우러나기 딱 좋은 시간 동안.
세한도는 서촌의 경복궁 영추문에서 발원한 상상력이 이곳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거꾸로 사람을 대패질하니 사람이 선명해지고 나무 향이 돋는다. 다시 영추문을 빠져나와 김정희 생가를 찾았을 때 통의동 35번지 그곳에는 밑동만 남은 백송이 시간의 넓이를 낭독하고 있었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추사의 유배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이곳에 소나무과 더글라스 퍼가 필연처럼 놓였다. 장식도 장치도 뭐도 아닌 있어야 할 것만을 간추린 추사의 그림 속 풍경처럼.
서촌을 배경으로 예술혼을 불태운 겸재 정선, 시인 이상, 추사 김정희처럼 서귀포로 온 건축가 조민석과 스킨 텍스처 디자이너 홍동희, 그리고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각기 자랑할 만한 장기를 놀려 나무 공간을 수식했다. 실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홍동희의 가구들이다. 돌과 철, 나무, 이질적인 자연의 물성을 소개하고 화평케 하는 그의 재주가 제주의 시간 한 중심에 테이블을 놓고 추사 김정희를 기념하고 있다.
더글라스 퍼와 결합한 제주 현무암은 추사의 벼루에 담긴 먹이다. 나무 테이블은 추사의 경지를 말하듯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고 풀어 헤치며 동서남북으로 펼쳐 나간다. 여기에 건축가 조민석은 아예 건물 전체를 벼루 형상으로 새겼다. 마침 벽난로 굴뚝이 붓 형상을 하고 있다. 다시 작가 홍동희는 화답하듯 1억 년 자연의 깊이를 벽면에 새겨 추상적인 스킨 텍스초를 완성했다. 흥이 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그 나름의 정통한 기법으로 대가들의 작업 앞에 추사의 깊이를 보여준다. 영상이 흐르는 모니터 속 세한도에는 후대가 놓친 당대의 계절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진 모든 것
건축설계 집단 매스 스터디스(Mass Studies)를 운영 중인 건축가 조민석은 돌과 나무, 철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설계하는 중 자연의 이치를 담으려 노력했다. 이는 홍동희 작가의 생각과 닮아있다. 그 역시 자연으로부터 온돌과 나무, 철을 매개로 수억만 년 시간의 흔적을 새기는 작가이다. 조민석은 홍동희를 만나고, 홍동희가 조민석을 만난 일을 추사 김정희의 주선이라 여기는 사람은 작가 이이남만이 아닐 것이다.
건축가 조민석의 건축물에는 맛과 멋이 느껴진다. 인공적인 것에서 찾을 수 없는 오직 자연의 맛이며 제주의 돌과 나무, 철이 어우러진 맛이다. 추사는 마치 이곳에 티스톤이 들어설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이남의 작품 속에서 열정을 불태운다. 앙상한 가지에 푸른 잎이 밤이 지나 해가 돋는 신새벽 눈이 내리는 신(新) 세한도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 속에서 그 또한 차향처럼 짙은 예술혼을 꽃피우며 짙은 먹그림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 추사체를 완성하고, 차(茶)로 맺어진 초의 선사와의 인연을 다졌기에 이이남의 <추사체 연구>라는 7분 25초짜리 영상은 티스톤의 공간적 맥락과 제주라는 지역적 특색을 담은 오설록 티스톤의 서시(序詩)라 볼 수 있다. 세한도 영상 맞은편으로 제주의 푸른 바다가 남실거린다. 꼭 벼루 속에 담긴 먹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미국(뉴욕 컬럼비아대학 건축대학원)에서 공부한 조민석 건축가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집약된 이 공간 속에서 추사 예술의 시원인 벼루를 떠올렸다. 그리고 더하고 뺄 것이 없는 근본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오설록 티뮤지엄 티스톤은 축약의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리고 이 여백의 미를 헛되이 쓰지 않은 홍동희 작가와 이이남 작가의 공력이 참다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비단 이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도 아름다운 이곳이 예술의 경지로 다가서지 않으면 통하지 않았을 이곳에 티스톤은 알맞은 크기 알맞은 감성을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추사 김정희로 보이는 사람이 차를 시켜놓고 누군가에서 편지를 작성하던 모습을 보았노라, 그래도 농이 되지 않을 구도가 아름답게 분화한다. 마치 잣나무 세 그루와 소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세한도 이들의 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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