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가 이윤엽...손에 잡히는 대로 깎고 칠한다

아트 / 강진희 기자 / 2024-12-30 19:18:07
그가 관찰하는 사람은 대체로 소박하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뜨겁다. 예술과 사회를 말할 땐 좀 차갑다. 그러다 나무를 만나면 순박한 소년이 된다

 

예술가의 책상에 다가가는 귀한 기회를 얻으면 참지 못하고 이게 뭐냐고 묻고 만다. 이어서 이런 건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본다. 행여나 결례를 범하거나 낮은 수준의 교양이 드러날까 걱정스러워 사전에 이것저것 뒤적이면서 준비한 시나리오가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비예술가는 예술가의 모든 집기가 생소하고 신기하기 마련이라 본론으로 진입하기 전까지 그런 1차원적인 호기심을 들켜버린다. 하지만 그에겐 다르게 물어야 했다. 설마 이걸 썼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작업 중이던 마티카 목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게 있어서 그랬다. 목판보다는 전지, 작품보다는 대자보에 적합한, 그러니까 지극히 평범한, 아니 실은 좀 시시한 빨간색 매직이 그의 책상을 굴러다녔다. 

 

때때로 먹과 붓을 쓰기도 하지만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린다고 했다. 어젯밤 깎다 만 붉은 목판도 그렇게 손에 잡힌 매직으로 초반 작업을 마쳤고, 매직이 지나간 자리를 칼끝이 거칠게 따르고 있었다. 평소 화풍과 달라 보인다 했더니, 무심코 그려 본 건데 한 계절을 이걸로 보내볼까 싶을 만큼 잘 나왔다며 신이 나 있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역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야 일이 잘 돼.”

그가 나무를 택한 이유 



목판화가 이윤엽의 작품은 뜨겁다. 굵고 거친 선이 두드러지는 강렬한 표현을 즐긴다. 소재, 즉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반대로 참 소박하다. 붕어빵 파는 아주머니, 아파트 상가를 청소하는 아저씨,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우직한 할아버지와 몸뻬를 입은 드센 할머니는 그의 목판에 자주 찾아오는 친근한 단골이다. 더러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역대 대통령 같은 권력의 직업군도 나무에 새기고 찍는다. 묘사는 정교할지언정 그들을 향한 시각에는 그간 단골들과 나눠왔던 온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계급을 논하는 방식이다. 

 

 

한편 원색을 과감하게 펼쳐놓는 것으로 숨이 턱 막힐 듯 세고 강한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검은색 잉크 하나만 있어도 작품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돌연 뭉클해지기에 충분하다. 그가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토록 소재는 분명하고 표현은 화끈하지만 사실 그건 통제의 결과물이다. 이런저런 미술의 많은 분야를 경험한 뒤 나무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나무를 일종의 여과기로 바라봤다. 나무를 한 번 거쳐서 표현하면 발상과 의도가 부드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이미 뜨겁다. 나무라는 필터를 써서 저 만큼이라면 그의 속은 펄펄 끓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예술가인 동시에 운동가다. 그리고 몇몇 진보 언론 사이에서 ‘파견 미술가’라는 이색 직함으로 통한다. 인터뷰를 의뢰한 시점 진도 팽목항 아니면 밀양 송전탑 근처에 있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을 만큼 그는 평택 대추리, 제주 강정마을, 서울 용산, 쌍용과 기륭전자 본사 등 시대의 양심이 멍든 현장을 찾아가 힘을 보태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쌓인 현장 경험이 말해주는 것처럼 예술과 노동, 그리고 작품과 작업의 경계 해체에 관한 상당한 통찰을 분명 갖고 있을 테지만, 그렇지만 그는 진정성과 열정, 부조리와 모순 같은 거창한 개념을 두고 길게 토론한 끝에 탄식하기를 즐기는 공허한 지식인 유형이 아니다. 무용담을 늘어놓을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진짜로 몸을 움직이고 발로 뛰는 사람일수록 말이 별로 없다. 파견 미술을 회고하는 그의 말투부터 꽤 건조했다. 그가 현장에서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이 그렇게 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다. 혹은 위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목판화가이지만 시위 현장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무를 깎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동적으로 현장의 성격에 맞는 작업을 한다. PC가 보이면 그래픽을 하고 자동차에 물감을 칠해 자동차 업계 노동자들과 연대하거나 현수막을 제작한다. 그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현장의 목소리는 대개 비슷하고 단순하다. 나는 억울한데 권력을 가진 자는 그걸 들어주지 않으며, 약하고 가난한 나를 사회가 괴롭힌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그런 단순한 메시지 앞에서 작업까지 복잡하고 스펙터클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집에서 굳이 챙겨가지 않는다. 현장의 공기에 적응하고 사람과 소통하면서 현장의 질료를 믿으면 결국 쓰임새가 있는 작업이 나온다. 그러다 보면 전과 다른 새로운 작품 세계가 나오기도 한다. 집에서 책 한 권 제대로 안 읽는다는 그에게 현장은 갑작스럽게 발전을 안겨주는 곳이다.

2500만 원짜리 집 



현장에서 그는 존중의 대상이지만 동네로 돌아오면 처지가 달라진다. 지금은 상황이 좀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를 괴롭히는 이웃이 이제는 다행히 두어 명밖에 안 된다. 행정구역 상 엄연한 경기도이지만, 그가 몇 해 전 폐가를 얻어 자리를 잡은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는 집 근처의 초등학교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리고 그의 집 바로 앞에서 모내기 소작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시골이다. 

 

비교적 젊은 사람이 그를 제외하고 동네에 딱 둘인데, 둘 다 알코올 중독자라 사람들과 소통을 잘 안 한다. 그런 동네에 6년 전쯤 내려와 작업실을 구축하고 자리를 잡는 동안 첫 한두 해는 김치 물어내라, 훔친 돌 내놔라 항의하는 이웃들의 등쌀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근처에 사는 어르신들이 그가 전깃줄을 밟아서 전기가 끊기는 바람에 냉장고 김치가 다 엉망이 됐다고, 오랜 기간 마당 앞에 놓여있던 돌이 사라졌다고 그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모르는 일이다.

 


마을회관에 모여 화투치는 어른들은 한때 그를 두고 여러 번 드라마를 썼다. 어느 날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고 다음날 그는 막 출소한 전과자가 됐다. 최근 결혼해 아내와 함께 살고 있지만, 2,500만 원짜리 집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제부도라는 다른 후보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안성에 혼자 내려왔던 몇 해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정착과 동시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버려진 자재들을 찾아 용도가 폐기된 마구간과 마당의 천장을 덮어 작업실을 꾸렸다. 젊은 남자가 홀로 내려와 돈은 안 벌고 동네의 쓰레기만 긁어다가 하루 종일 망치질만 하고 있으니 이러쿵저러쿵 말 만들기 딱 좋은 수상하고 불편한 객일 수밖에. 

 

그러나 그의 정성이 결국 마을의 집단적인 텃세를 이겼다. 끊임없이 말을 붙였고 등지고 가는 어르신을 앞질러 뛰어가 인사했으며 그들의 손부터 살피고 짐이 보이면 잽싸게 거들었다. 그러다가 오랜 기간 이어진 공사 끝에 집의 2층을 올린 순간 제법 일 좀 하는 사나이라는 인정이 따라왔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이제는 마을 어르신들과 대체로 원만하게 지내지만, 아직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속 좁은 이웃이 그래도 좀 있다. 알고 보니 그보다 1년, 2년 일찍 온 타지 사람들이다.

 


그의 집 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고 상추와 토마토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현관에는 직접 수확한 감자가 한 바구니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농사라 했다. 평생 밭을 가꿔온 옆집 식구들이 하는 걸 보고 그대로 따라 했으니 처음부터 일을 그르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옆집의 농부들은 그의 작업까지 도운 콘텐츠 제공자들이다. 

 

그는 책 한 권을 쓰고 그린 작가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직업의 세계를 소개하는 시리즈 북 가운데 하나를 완성했는데, 그는 농부 편을 맡아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보고 배운 뒤 직접 경험한 농부의 1년 일과를 판으로 찍어 이야기를 붙였다. 하는 동안 의욕이 넘쳐 아침부터 저녁 열 시까지 목판을 붙잡고 있었다. 내용에 몹시 만족했던 출판사도 신이 나서 적극적인 홍보를 펼쳤고 이런저런 도서전에 죄다 출품했다. 그런데 성과가 없어서 기운이 좀 빠진다. 열중했던 지나간 시간들이 갑자기 떠오를 때면 열도 받는다. 들인 공과 다수의 기대에 비해 많이 못 팔았다는 얘기다. 한의사 편은 잘 나간다고 했다.

나무의 재발견 


 


가끔 책 일러스트를 한다. 돈이 떨어지면 한다. 그의 작품을 가장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은 아내인데, 매번 좋다고만 하니까 아내가 하는 말을 잘 못 믿는다. 그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의 작품에 좀 무신경하다. 여태 보관하고 있는 목판들은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놔두다 보니 갖고 있게 된 것이다. 작품이 찍힌 종이보다 처음에 깎은 판이 더 멋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한 번 쓴 목판을 뒤집어 뒤판을 또 깎는 일도 부지기수다.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리고 칠해 작업을 시작하는 것처럼 판도 종이도 크게 가리지 않는다.


그는 집착과 구속을 잘 모른다. 재료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예술가라면 작품세계가 명확하게 구축되어야 한다고 혹자가 말할 때, 그도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한다. 작품에 일관성이 생기면 세상과 소통하기도 편하고, 하던 걸 계속하면 되니까 작업하는 자신도 편하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고, 한참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의 인간관계 안에서도 그가 되어야 마땅할 예술가상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남아있질 않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구난방으로 일해왔지만 그래도 그런 스스로를 믿고 뭐가 됐든 계속 작품을 하는 태도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자유로운 표현으로 새로운 세계를 찾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믿고 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안다.

 


매 순간 고민만 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여유를 즐기고 있다. 특히나 최근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취미가 있다. 그의 오랜 작품 활동, 그리고 끊임없이 집을 고쳐왔던 일과와도 긴밀한 분야다. 목공이다. 여러모로 필요성을 느껴 동네 목공소를 찾기 시작했다가 문짝을 전문으로 해왔던 40여 년 경력의 목공소 사장과 친구 같은 관계가 됐다. 경험 많은 목수는 조각가에게 나무를 다루고 가구를 만들고 집을 설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젊은 목판화가는 거기서 나무를 배우는 공부방을 만들어 커리큘럼을 짜고 목수에게 선생님이 될 것을 권하며 그의 권위를 다시 세운다. 실습도 계속한다. 한 1년쯤 하니까 기성품을 참고해 만드는 게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가구 하나를 제대로 만들려면 한 달쯤 붙잡고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 이미 만든 걸 따라 하는 작업에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까운 것이다.

소년의 얼굴, 청년의 얼굴 



지금이야 취미에서조차 창작이 긴급한 사람으로 살지만, 모방은 한때 그의 직업이었다. 어릴 적부터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던 그는 스무 살 무렵 서울과 경기도의 극장을 전전하면서 간판을 그렸다. 일하면서 마지막으로 만난 스승은 70대 노인이었는데, 입대를 앞두고 극장을 관두면서 제대하고 돌아오겠다고 간곡하게 말했지만 선생은 듣질 않았다. 올 생각하지도 말라 했다. 그 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서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스승은 그의 실력을 못 믿어 내친 것이 아니다. 극장 간판쟁이란 곧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 직감하고 모질게 정을 떼어 버린 것이다. 어른의 예측은 옳았고 그는 영영 극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더는 간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뒤늦게 대학을 찾아 미술을 학문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재능과 경험 덕분에 고민하는 시간을 덜고 자신의 분야를 일찍 찾았다. 일단 나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요새는 다른 나무 때문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고 거기 미친 사람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뜰 때면 공방으로 달려갈 생각에 그는 들떠 있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는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이제 거기 그만 가고 작품에 좀 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렇게 후회하고 다음날 어리석게도 다시 흥분해 기어이 공방에 또 간다는 그로부터,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은 두 얼굴을 떠올렸다. 뭐든 손에 잡히면 그림을 그리는 소년의 얼굴, 그리고 눈물이 날 만큼 그림을 갈망하는 청년의 얼굴을 그는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얼굴에서 그늘과 피로를 볼 수도 있다. 작품으로 또 참여로 예술과 사회의 한복판에 서 있지만, 그러나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전에 어제 들여온 질 좋은 은행나무 판을 자랑하는 일이 더 급한 사람이다. 불평등과 불합리에 분노하기에 앞서 동네 목수의 답이 없는 밥벌이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는 세상이 우리를 쿡쿡 찌를 때, 분노의 언어를 보태는 대신 붓이든 매직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린다. 이어서 나무를 깎고 잉크를 발라 종이에 찍는다. 혹은 집을 떠나 세상 속으로 파고든다. 습관적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그로부터 거창한 후일담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최근 그의 최근 관심사로 저물지 않는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며 거기 제대로 흥미를 보이면 동네 목수에게 데려갈 것이다. 나무 잡지를 들고 그를 찾아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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