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아득하고 오래된 사물의 역사를 100년 전의 신조어인 '공예'란 말로 수식하기에는 무리와 한계가 따른다. 우리의 선조들은 '기물'이거나 '정진'으로 구분했다. 잘 만들어 쓰거나, 정신을 가다듬는 행위로 사물을 마주했다. 우리 사물의 역사를 미술과 공예 혹은 디자인으로 재편한 것은 겨우 백 년 밖이다.
흙으로 만든 '잔'은 물을 담아야 하는 숙명으로 탄생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 근거를 떠날 수 없다. 물이 사라진 세상에 잔이 있을 수 없다. 그 나머지는 모두 수식에 불과하다. 굳이 잔의 미학에 몰입해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은 작가의 자유지만 자칫, 미술도 공예도, 기물도 정진도 아닌 모호성에 빠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어떤 조각가는 "공예가는 '슬픔'을 조각하지 않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 없다"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속칭 공예가들이 슬픔과 아픔을 새기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굳이 예술이어야 하나,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잔은 흙의 선물이다. '도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버려야 도자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잔은 그저 잔일 때 가장 아름답고 유용하다. 슬픔은 그 잔을 손에 든 사용자의 삶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잔이라는 기물과 맑은 물이다. 잔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 물과 찻잎이라는 자연의 순리가 상존하고 있다는 징조다. 미술과 공예는 그다음, 그 그다음의 문제다. 예술이 결과론적 의미라면, 기물(공예)은 시작에 그 뜻이 선명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좋은 잔에 따뜻한 물이 담기는 순간의 절정이 모든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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