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 개인전, <이하여백>... 애도를 넘어 슬픔을 조각하고

칼럼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6-11-06 22:30:10
▲ 유현 작, 간절히

 

죽음이 무엇인가를, 살아 있는 자는 살아 있어 모르고 죽은 자는 죽어서 말 할 수 없다. 죽음은 살아 있던 것의 소멸이고 수분(水分)이 증발된 상태다. 사랑의 대상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상실감은 ’애도‘에 포장되어 마음의 무기질로 남는다. 애도는 씻기지 않는 슬픔의 각질로 남아 산 자의 삶을 망연자실케 한다. 애도는 흘러간 강물의 후미를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무기력이면서 슬픔의 통속이다. 부단히 애도를 껴안고 쓰다듬어 용서를 빌어도 후련하지 않다.

유현의 개인전 <이하여백>은 애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로하는 최후의 선택지며 여백이고 창작자의 작업실이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시절 그 자체가 애도일 때 작가는 몸살을 앓는다. 유현의 지난 3년은 마음의 구석진 방에서 공기 속을 떠돌아다니는 애도를 만지고 호흡해야 했다. 애도라는 비물질이 작가의 감각 위를 선회하면서 슬픔의 농도를 높였고, 작가는 그 슬픔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고자 했다. 애도는 밤의 습기에 숨어 있다가 수시로 나타나는 비정하고 슬픈 검은 체액이지만, 유현에게 애도는 다시 비상하는 새의 날갯짓이다.  

 

▲ 유현 작, 빈집과 우리

 

‘어머니’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절대적 대상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모호한 난제이며 적당히 봉제할 수 없는 상대적 실체다. 유현에게 어머니는 아들에게 수혈하듯 사랑을 건넨 존재이자, 그 사랑의 크기만큼이나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다.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탈출하기 위한 필살기는 ‘애도’다. ‘이하여백’에는 애도의 선이 줄을 긋고 빈칸을 메운다. 살기 위한 몸서리침이 작가의 언어를 뿌려 여백을 채우고 만다.

유현은 크리스천 어머니를 애도하는 방식으로 ‘제사’를 선택했다. 이는 어머니를 위한 제례가 아니라 잘 살아가고자 하는 자신을 위한 제례 의식이다. 작가는 자신을 위로하는 애도를 ‘불투명도’, ‘윤슬’, ‘소복’을 짓고, ‘수묵의 화환’과 ‘개화식물’을 다듬고, 이어서 ‘빈집과 우리’, ‘간절함’과 ‘짧은 휴식’을 조각한 후 ‘허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애도의 ‘이하여백’을 만난다. 이제 어머니와 자식의 간절함은 ‘우리은하’에서 기억으로 재결합하고 불가분의 관계임을 호소한다.

유현의 작품 <불투명도>는 어머니가 상실한 언어의 흔적을 선명하게 조각했다. 의식의 불투명과 소통의 한계는 선명한 기억의 이미지로 살아남아 산 자의 의식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윤슬>은 깊은 주름을 따라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을 부조로 옮겼고, <소복>은 생전의 어머니를 추억하고 살아갈 삶에 대한 염원을 관통하는 나무 조각이다. 나무 톱밥을 이겨 만든 <수묵화>는 작가의 부단한 삶을 상징하면서 모든 망자에 대한 추념이 깃든 작품이다. <개화> 또한 이미 사라진, 끝나버린 것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으로 앙상하게 마른 목재의 잔여물에는 유동하는 물질의 생태계를 느낄 수 있다, <빈집과 우리>는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공백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누구는 떠났고 누구는 남아 생의 우환을 통곡한다. 사람은 떠났지만 슬픔은 공간의 모서리에 더 깊게 걸려 있다. 

 

▲ 유현 작, 소복

 

목조각 <간절히>는 어머니를 간절히 추모하는 마음의 말미를 조각한 것이다. 이는 가상의 비현실 세계이며 기억의 추상이고, 작가의 현실을 떠난 현실이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가장 비통하고 애절하다. <짧은 휴식>은 휴지기의 공간에 걸터앉은 작가의 초상이다. 그래서 나무 의자는 더 고독하고 외롭다. 작가는 다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허그>는 자기반성을 조각한 작품이다. “있을 때 잘 해“는 남녀의 통속적 말이 아니다. 익숙하고 쉬운 것은 누구나 놓친다. 모든 것은 없어졌을 때 비로소 보인다. 한 번 더 안아주지 못한 기회의 상실은 이 세상 모든 자식의 업보이다. 고즈넉하게 감고 있는 두 눈은 어머니와 자식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만나 서로를 감싼다. 원인과 결과 값이 하나의 몸을 이룬 것이다.

<이하여백>은 이 모든 여정의 막바지에 이른다. 지난 3년의 애도는 여기에 숨는다. 그리고 다시 상승할 것이다. 내리 사랑으로 가야하는 운명의 시간이 작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어떤 의지와 결단도 감당 못하는 자연의 이치다. 어머니를 내딛고 새 생명이 태어난다. 생명은 죽음을 보다 강하고 질기다. 그 기운에 산 자는 다시 살아간다. ‘이하여백’은 생명의 이치에 순응하고 고개 숙이는 의식이었고, 유현은 그 길을 선택했다. <우리은하>에서 비로소 작가는 어머니를 만난다. 생과 사가 하나의 운명이 되고 은하수를 비행한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두 사람은 길은 다르겠지만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는 모순의 모순을 직면한다. 애도는 소멸한 자리에 슬픔의 산을 크고 높다. 작가는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꿈꾼다.

죽음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간을 살아야 하는 삶의 운명이 쓸쓸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이기에 단순히 만드는 존재를 넘어 사유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류의 애초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공포였다. 부재에 저항하고 한계에 좌절하는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명명하는 자들이 소위 작가다. 인류 최초의 조각은 돌에 시신을 새기는 일이었다. 생명을 실제가 아닌 이미지로 저장하는 것이 예술가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말하고 조각하는 일은 예술의 시초이자 본질이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예술은 장식에 머문다.


▲ 유현 작, 불투명도


애도는 검은 담즙의 땅에 뿌려진 슬픔의 단서다. 애도는 대지가 메마르고 식물이 사라진 건조한 사막에서 슬픔을 멈춘다. 그래야만 산 자의 자유와 휴식이 찾아온다. 잘 보내는 것이 애도라면, 잘 간직하는 것은 애도의 마침표다. 애도의 계곡을 통과하는 것은 슬픔의 에너지를 통해 작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과정이다. 유현의 목표는 궁극의 자유를 향한다.

작가 유현이 어머니를 대상으로 애도의 제례를 치르는 것은 결국 생의 부재와 죽음의 실체에 다가서려는 무의식의 발로이다. 본질을 극복함으로써 애도의 무게를 덜어내고 했다. 유현에게 ‘죽음은 삶의 미래이고, 삶은 죽음의 과거’라는 어느 평자의 말을 입히고자 한다. 인생은 상처로 지어진 모래성이다. 매일 조금씩 아파해야 하고, 닳고, 사라지는 존재다. 단지, 유현은 이 모든 과정을 창작의 산실로 돌려놓고자 한다. 슬픔을 극복한 애도의 자리에 작업이 꽃피고 작가의 생명이 만개한다.

글: 육상수 
_

<2026 공주문화관광재단 차세대작가전 유현 개인전>
전시명 : 이하여백
전시공간 : 아트센터 고마
전시기간 : 2026. 11. 11 – 11. 22
주최 : 공주문화관광재단
후원 : 공주시, 공주시의회
큐레이터 : 박동욱

 

[ⓒ 우드플래닛.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AD

관련기사

공예의 어떤 우상(偶像)2026.01.06
스튜디오포 개이전 <내가 던진 모든 질문>...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2026.08.24
공예에 있어 경계(境界)와 한계(限界)2026.05.03
ART MOON_ 빛의 곡절 曲折... 그림자가 꿈꾸는 일종의 ‘밤의 사건’2026.10.27
‘Clay of Eidos : 추상을 위한 절대 조형’2026.09.07
뉴스댓글 >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