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익 목수의 유년시절은 서울 한남동에서 시작되었다. 황해도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던 한남동에서 제재소를 운영했다. 동네 한가득 판자촌이 즐비했지만, 홍성익 목수의 집은 꽤 부유했다고 한다. 제재소를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꽤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나무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많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홍성익 목수는 친구들이 보자기에 싸인 책을 들고 다닐 때 가죽 가방을 멨고, 검정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피난촌에서 자란 소년, 목수가 되다
"그때는 이상하게 공부가 싫었어. 대신 나무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드는 일은 재미있더라고. 아버지는 싫어하셨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왜 이런 걸 하냐고. 하도 공부를 안 해서 엄청 두드려 맞은 적도 있었어."
그러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지 않은가. 황성익 목수의 아버지도 결국 아들의 뜻을 인정해 주었다. 이후로 그는 천호동, 응암동, 홍제동 일대의 목공소를 돌아다니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유하게 자라던 소년이 졸지에 고달픈 목수의 길을 나선 것이다. 월급은 커녕 밥만 먹여줘도 감지덕지였고, 처음 1년간은 선임 목수들의 세수할 물까지 떠다 날랐다. 그렇게 고된 일을 도맡아 하기를 1년, 처음 배운 것이 끌질 하나였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다른 일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목수 일 말고는 하고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목수가 목수를 알아보는 방법
40년이 넘는 시간을 문짝만 만들었다는 홍성익 목수. 그는 우리나라에서 손으로 나무를 짜는 목수의 마지막 세대다. 당연히 그에게서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는 연장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을 부릴 때 월급을 측정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목수를 경력으로 판단하는데, 좀 더 정확한 사람이라면 목수의 연장을 봐요. 어떤 연장을 가지고 있는지, 연장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연장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이 보이거든요. '나 10년 일했어요'라고 말하는 건 소용이 없어요. 10년을 했어도 연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4-5년을 했어도 연장을 제대로 다루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에게 있어서 연장은 목수의 명함이자 자존심이다. 그의 공구함은 칸별로 다양한 연장들이 점잖게 놓여있다. 그곳에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과거 전통 방식의 연장들도 많다.
그 목수가 살아남는 법
홍성익 목수가 운영하는 홍익목헌(공방)에는 전시품도 없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교실도 없다. 공식 홈페이지는 물론, 하다못해 '홍익목헌'이라는 번듯한 간판도 없다. 대체 마케팅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거냐고, 주제 넘는 참견과 잔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게 참 어려워요. 나야 만드는 것만 알지,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장사하는 법도 모르고."
그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비단 인터넷 뿐 아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건축 소재로서의 나무사용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샤씨와 플라스틱이 집 안에 들어오고, 철과 시멘트가 나무의 자리를 대신 했다. 거기에 예쁘고 편리한 가구를 싼 값에 파는 대기업들이 등장하면서, 홍 목수와 같은 전통 목수들의 손이 놀게 된 것이다. 시대의 변천사가 한 목수에게 끼친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한 번은 먹고 살 길이 없어 다른 일을 해야 할까고 고민했지만 평생 목수로 살아온 그에게 나무 아닌 다른 일은 엄두도, 흥미도 나지 않았다.
그는 거래에도 머리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은 건축공사에 참여했는데 입금이 안 돼서 문짝을 떼어버린 적도 있다.
“우리가 주로 문짝을 만들었는데, 보통 문짝은 건축 중 가장 마지막에 하는 작업이거든요. 처음에 땅 팔 때는 돈이 있어. 그런데 업자가 중간에 돈을 다 쓰고 없는 거야. 문짝, 유리, 도배. 이렇게 가장 나중에 하는 작업은 돈을 떼어 먹히기 일쑤에요.”
하지만 그는 문짝을 떼어서 가지고 가지는 못했다. 그저 옆에 놔두었을 뿐이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돈을 떼어먹고 도망친 업자들을 2-3년 후에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그는 인사동에 물건을 납품해 보기도 했고, 관공서나 박물관의 유물을 보관할 수장고를 만들기도 했다. 중간에 돈을 떼어 먹힌 적도 많다. 나중엔 주인이 직영으로 집을 짓는 개인업자와 주로 일을 했다.
늙은 목수와 젊은 예술가들의 주거니 받거니
최근 홍성익 목수는 안성에 거주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목공예를 가르치며 관계를 맺고 있다. 홍성익 목수와 이웃하여 살고 있는 목판화가 이윤엽 씨의 공이 컸다. 처음에는 후배들이 나무를 어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40년 이상 목수 일을 해온 그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후배들에게서 나도 배웠어요. 아, 처음에는 어려운 거구나, 이건 당연한 게 아니라 가르쳐줘야 하는 거구나 하고. 이제는 '이까짓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씩 가르쳐 줘요."
그에게 나무를 배우는 젊은 예술가들은 홍 목수에게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들려준다. 서울에 공방이 얼마나 많은지, 안성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에는 가 보셨는지. 만들어 놓은 제품을 인터넷으로 홍보하거나 팔 생각은 없는지. 홍 목수는 새로운 세상에 조금씩 눈 뜨기 시작했고, 느린 걸음이지만 세상과 조금씩 발맞추기로 했다. 혼자였다면 결코 해낼 수 없을 일이다.
홍성익 목수는 요즘 간편하고 현대적인 가구 제작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작 방식은 그가 배웠고 고수해 온 전통 방식이다. 특히 최근에 만든 접이식 소반은 다리마다 받침이 들어가는 대신, 소반의 면 아래를 횡당하는 나무 띠가 끼어져 있다. 나무의 탄성을 이용해 다리를 고정하는 방식이다. 얇고 단단하면서도 탄성을 가진 소재로 미송을 택했다. 백송 소반은 후배들과 안성 프리마켓에 갔다가, 사용이 번거롭고 무거운 플라스틱 테이블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오늘날 우리가 원목 가구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그러니까 순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이 사는 공간에는 나무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보면 대부분이 플라스틱이나 철, 아니면 필름으로 다 붙인 합판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 값싸고 편리하긴 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삭막해 보이지 않아요? 집 바깥은 이해가 되지만, 내부는 목조가 들어가야 사람들 마음이 따뜻해져요. 모르겠어요. 나라면 그래."
홍성익 l 1983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선반 부분 동메달. 국립박물관 및 시립박물관 수장고 내 유물장 다량 제작. 목공예부분 ISO 9001 인증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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