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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은 간다>, 2011, 개심사 소나무, 37×35×7cm |
아주 우연한 만남
어렸을 때는 위인전을 읽는다. 성공한 사람, 잘난 사람, 위대한 사람…. 그들을 롤모델로 삼으며 꿈을 키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런 ‘큰 이야기’보다 이웃의 소소한 ‘작은 이야기’가 더 솔깃하다. 빛나는 인생보다 어눌한 인생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렸을 때는 남의 삶을 흉내 내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 줄 알게 되기 때문일 게다. 송진화 작가, 그녀가 보여주는 풍경이 마음을 적시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사실 그녀가 목조각으로 첫 전시회를 연 게 2007년이니 어찌 보면 신예라 할 수 있다. 애당초 그녀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동아미술상을 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화실을 차려 입시 미술을 가르치게 되면서 작가가 아닌 생활인이 되어갔다. 가끔은 미치도록 그림이 그리고 싶었지만 쉽게 붓을 들지는 못했다.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세월은 저 혼자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런 어느 날 미술관으로 나들이를 나섰다가 꼭두 인형 하나를 보게 되는데,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한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연장이라고는 작은 직소기와 커터 칼밖에 없었지만, 공사장에서 각목 하나를 주워와 인형을 만들었다. 공사장에서 나뒹굴던 나무라 때가 꼬질꼬질 끼었는데, 막상 다듬고 다니 속살이 뽀얀 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한다. 바로 그 순간 나무가 내게 와서 말을 건넸다고. 10여 년이 훌쩍 넘는 아주 긴 공백기가 비로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조각을 전공한 것도 아닌 터에 어느 날 느닷없이 나무를 만지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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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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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 나무에 혼합 매체, 13×39×13cm |
“아무래도 전생에 막노동꾼이었나 봐요. 저는 체질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힘을 써서 하는 일을 좋아해요. 그래서 동양화가 맞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동양화는 작업 과정이 길어요. 화도(畫圖) 떠야지 배접 해야지 밑작업이 많지요. 준비 다 끝내 놓고 막상 화선지에 그리려고 하면 그리기가 싫어져요. 그게 제 성격이더라고요. 그래서 조각 작업이 참 좋아요. 그동안 자꾸만 솟구치는 에너지를 쓸 데가 없어 옷 만들고 가방 만들며 견뎠는데, 나이 마흔이 돼서야 몸에 맞는 일을 찾은 거죠. 잠재돼 있던 에너지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어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고, 작업실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두근두근 설렜죠. 비로소 내 인생의 황금기가 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만큼 행복했고 더는 바랄 게 없었죠.”
폐목에 오버랩된 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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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바람이 날 재워>, 2011, 나무에 혼합 매체, 35×24×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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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천사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아니, 그 행복의 질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자신의 삶이 정체돼 있다고 느낄 때 인간은 얼마나 큰 좌절을 느끼는가. 얼키설키 엉켜 있어 도무지 풀 도리가 없는 매듭은 얼마나 두려운가. 그녀가 느끼고 있는 행복감은 아마 빨래 같은 것일 게다. 케케묵은 상처의 때, 회한의 때, 후회의 때, 슬픔의 때, 분노의 때…. 인생의 숨구멍을 켜켜이 막고 있던 그 때들이 둥둥 떠내려갈 적마다 가슴이 점점 환해졌겠지. 그래서 작업실에 점점 쌓여가는 톱밥 먼지와 그녀의 행복은 정비례 관계다.
송진화는 동양화를 그리던 시절에도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고 했다. 지금 하고 있는 목조각도 인물 중심이다. 인물이 가장 클래식한 주제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법도 했다. 짚이는 게 있었다. 송진화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인물이 적합한 매개라고 했다. 정직한 대답이다. 그런데 그녀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만들어내는 인물 조각들이 실은 그녀 자신의 무수한 페르소나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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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터지도록>, 2011, 소나무 및 회향목, 80×45×12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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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따끈>, 2011, 느티나무, 45×90×30cm |
송진화 작가는 재료로 쓸 나무를 목재소에서 구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길을 지날 때마다 나무가 눈에 띄면 한 토막씩 주워다가 사용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작은 소품 위주로 작업을 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주변 지인들이 공급처 역할을 자처했다. 저기 어디 가니까 쓰러진 나무가 있더라는 둥 어디 사는 아무개가 개보수 공사를 해서 폐목이 많이 나왔으니 가져가라 둥 소식을 전해 왔다. 이제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활개치며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사용하는 나무 재료에는 제각기 사연이 담겨 있다. 놀이터 미끄럼틀의 기둥 노릇을 했던 나무, 몇 년간 절집 뒷간에서 면벽했던 나무, 오랫동안 누구네 집 자개장 문짝이었던 나무, 굼벵이가 살았던 나무…. 나무 자체가 저마다의 삶과 이야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덧씌웠다.
“땅바닥에 쓰러져서 뒹굴고 차이다가 종래는 흙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나무에 이야기를 만들어 주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죠. 언젠가 한번은 예산 추사고택에서 나무를 주워왔어요. 결구로 사용된 작은 나무토막이었는데 보수 과정에서 버려진 거였죠. 근데 결이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손을 거의 안 대고 살짝 다듬기만 했어요. 그 나무는 <히>라는 작품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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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 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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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밭에 굴러도>, 2011, 나무에 혼합 매체, 10×107×17cm |
저는 나이테가 있든 옹이가 있든 벌레를 먹었든 개의치 않고 그대로 살려서 활용해요. 그것들도 나무가 겪었던 인생살이의 흔적이잖아요. 남의 인생을 함부로 다룰 순 없죠.”
그렇게 해서 개심사 소나무는 낙화를 애달파하는 여인이 되었고, 조계사 팽나무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여인이 되었으며, 진주고택의 소나무는 보현보살이 되었다.
유행가 같은 작품 제목
송진화 작가는 완벽하게 계획을 세운 후 작업에 들어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몸이 먼저 가지 머리가 먼저 가지는 않는다. 이런 작업을 하고 싶으니 거기에 맞는 나무를 구해야겠다가 아니라, 나무의 형태와 상태를 보고 그에 맞는 작업을 찾아낸다. 그녀의 작업실 한쪽 벽면에는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작품이 걸려 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는데 하트 모양을 깎아낸 게 아니라 나무가 그렇게 생겼길래 형태를 그대로 적용했다. 원하는 형태를 깎은 후에는 채색을 하는데 채색을 위해서는 먹도 쓰고 아크릴 물감도 쓴다. 하지만 채색 역시 나무의 종류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나뭇결을 살리고 싶으면 투명한 스테인으로만 마감한다. 예컨대 그녀가 좋아하는 참죽나무는 나무 자체의 빛깔이 고와 가급적 색을 쓰지 않는다.
작업을 할 때 그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칼맛이다. 참죽나무처럼 밀도가 높아 단단한 나무는 칼을 대면 대는 대로 시원하게 깎인다. 반면에 소프트우드처럼 무른 나무는 잘 찢어진다. 또한 동일한 수종이라고 해도 칼맛이 고르지는 않다. 중심에 있는 나이테 부분은 단단해서 칼을 잘 받지만, 주변부인 변재(邊材)는 무르기 때문에 면이 깨끗하게 안 떨어지고 살이 뜯어진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작품 제목이 ‘무제’예요. 여지를 남기면서 상상할 수 있는 서술적인 제목을 좋아하죠. 유행가에서도 자주 따와요. 예전에는 클래식은 격조 있는 음악이고 유행가는 저속한 음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드니 유행가처럼 심금을 울리는 게 없더라고요. 유행가도 좋은 장르의 음악이죠. 쉬운 가사와 멜로디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작품이 유행가라고 생각해요. 무게 있게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가볍게 접근할 수도 있는 거고. 방식이 다를 뿐이죠.”
진실로 ‘분홍분홍한’ 삶이기를
그녀가 촬영을 하는 사이, 작업실 한쪽에 있는 문을 살며시 열어봤다. 아, 그곳은 연옥이었다. 술병을 든 채 만취한 여인, 자기 가슴을 칼로 찌르는 여인, ‘그 겨울의 찻집’인 양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는 여인…. 손으로 쓰다듬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지니.
그녀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참으로 먹먹했었는데, 그게 여자로서 느끼는 동병상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보니, 그건 여자니 남자니를 떠나 인간에 관한 문제였다.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살아낸, 그리고 살아가야 하는 한 인간.
작업실 입구 쪽 벽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붙어있다. 커다란 안경을 쓰고 해맑게 웃고 있는 여대생. 참 앳되고 풋풋했다. 송진화 작가의 사진이다.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다. 그녀는 ‘분홍분홍하다’라는 말을 곧잘 한다. 물론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말이니까. 누구나 핑크빛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 꿈을 쉽게 이룬 이도 있을 테고 간신히 이룬 이도 있을 테고, 또 이루지 못한 이도 많을 것이다. 그 ‘분홍분홍하다’라는 말이 애잔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 클수록 ‘분홍’은 ‘분홍분홍’이 되고 ‘분홍분홍분홍’이 되리라. 하지만 사진 속 그녀의 맑은 눈은 이제 더는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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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2012, 진주고택 소나무, 24×112×20cm |
작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짚고 해체하며 다시 재구성하는 게 아닐까. 맺힌 시간을 털어내고 자신을 비워내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자신을 채워넣고 있는 게 아닐까.
“이번 전시 때 깜짝 놀란 일이 있었어요. 어떤 여성분이 관람을 하다가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대뜸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행복해졌나요?’ 제 작품을 초기작부터 봤는데 이전보다 편안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예전보다 덜 지랄 맞아지긴 했죠’라구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그녀가, 아니 우리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이리라. 그녀의 말마따나 까짓 웃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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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밖엔 난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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